2017년 12월 31일, 서울교통공사 노사가 무기 계약직 전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최종 합의하자 이에 대한 비판이 SNS를 뜨겁게 달궜다. 요지는 정규직은 힘들게 대학 가서 어렵게 공채 시험에 합격한 ‘능력 있는 사람들’인 데 반해 비정규직은 그렇지 못한 이들이므로 같은 업무에 종사하더라도 처우에 차별을 두는 게 공정하다는 것이다. 해당 업무에 대한 10년 이상의 경력과 숙련은 시험이라는 선발 과정 앞에서 ‘무임승차’와 ‘역차별’이 됐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눈 사회 구조적 모순을 들여다보지 않고 개인의 문제로 돌린 것이다. 박권일 사회비평가는 “능력주의가 위험한 이유는 특권의식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소수에게 특권이 집중돼 있는 한 불평등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를 만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의 폐단에 대해 들어봤다.
취재 김한나 리포터 ybbnni@naeil.com
사진 이의종
박권일 사회비평가는
언론인 출신의 작가다. 2002년 12월부터 3년간 월간 <말> 기자로 일했다. 2007년에 쓴 <88만 원 세대>(공저)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참여정부 마지막 해에 국정홍보처 주무관으로 채용돼 <참여정부 경제정책 5년> 집필에 참여, 당시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 실패에 대해 평가했다. 그 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다문화반대카페’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등을 수개월간 취재해 <우파의 불만>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등을 출간했다. 현재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대학원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축제와 탈진> <소수의견> <능력주의와 불평등> <언어전쟁> 등이 있다.
극소수 ‘용’에게 특권 몰아주는 능력주의
대한민국을 ‘불평등은 참아도 불공정은 못 참는 능력주의 사회’라고 했다. 능력주의가 뭔가?
개인의 능력이 우월할수록 더 많은 몫을 가지고 능력이 열등할수록 더 적은 몫을 가지는 것이 당연시되는 걸 의미한다. 만약 ‘개인의 능력 차이는 명백하므로 불평등은 자연스럽다’는 논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이미 능력주의에 세뇌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능력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평등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조차 못하게 만든다. 오히려 이를 당연시함으로써 불평등이라는 사회 구조적 모순을 온전히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끊임없이 재생산되게 한다.
능력주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2000년대 중반에 한국의 넷우익(국수주의 성향의 우익 누리꾼) 현상을 관찰하기 위해 ‘다문화 반대 커뮤니티’와 그 뒤 등장한 정치색 짙은 ‘일베’까지 오랜 기간 그들의 사이트에 가입·상주해왔다.
특정 대상을 차별하고 혐오하며 욕하는 넷우익 이용자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일관되고 정당한 논리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능력주의’였다. 여성, 성소수자, 이민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가져가는 걸 ‘무임승차’로 표현하며 사회적 자원을 착취해간다고 믿고 있었다. 이들의 특징은 본인들을 ‘평범한 대한민국의 양심 있는 시민’으로 생각한다는 거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공감 능력이 내재돼 있어 타인에게 싫어하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상처를 주진 않는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그들이 혐오와 차별을 죄의식 없이 표출케 하는 강력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에 왜 이러한 능력주의가 우리 사회에 확산됐는지 그 근원부터 추적·조사하게 됐다.
개인의 능력에 따른 보상 체계가 정당하지 않다고 보나?
많은 이들이 상속이나 세습은 신분에 따른 차별이며 불공정하고 부정의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능력주의가 ‘공정하게’ 성립하려면 세습이나 상속과 같은 외부효과가 배제된 상태에서 개인의 능력, 즉 재능과 노력·성과에 대한 기여 등이 객관적으로 측정·평가돼야 한다. 또 이를 토대로 한 차등 분배에서 비례가 정확하게 지켜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 세 가지 조건 중 어떤 것도 정확하게 성립할 수 없다. 분배의 기준으로 가장 공정해 보이는 ‘노력’조차도 객관적 측정이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도 자신만의 노력으로 성과물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은 아이디어나 지식이 부의 원천이 된다.
아이폰만 하더라도 기존에 나온 기술들의 조합일 뿐 스티브 잡스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건 아니지 않나. 즉 지식은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왔고 만들어가는 공동 자산으로 온전히 어느 한 개인의 것이라 하기 어렵다. 이런 현실에서 성공을 온전히 개인의 성과로 돌릴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승자독식의 분배다.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걸 갖는다.
한국에서 능력을 판정하는 기준은 주로 시험인데, 이를 통과한 소수에게 특권을 몰아주고 나머지는 모두 패배자가 된다. 이런 식의 분배는 결코 능력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특권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고, 특권에 접근할 기회의 불평등에 대해서만 분노하는 게 현실이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준다면?
몇 년 전 최서원(최순실)의 딸 정유라를 비판한 글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를 모았던 ‘이대 학생의 일침’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가 중앙도서관에서 밤을 샐 때 너(정유라)는 어디서 뭘 했을까? 네 덕분에 그동안의 내 노력들이 얼마나 빛나는 것인지,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실감이 난다.”
정유라는 특혜를 받았다. 야구 경기로 치자면 3루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점수를 벌어놓은 사람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글을 작성한 이대 학생 또한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적어도 1루에서 태어난 사람 정도는 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등록금이 높은 대학 중 한 곳에서 공부할 수 있는 학업 능력과 가정환경은 전적으로 우연히, 불평등하게 주어지는 조건이다. 불법이나 편법이 아니라고 해서 인생 출발선의 불공정이 자동적으로 공정해지진 않는다. 즉 이는 공정성이 얼마나 주관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다.
또한 많은 사람이 겉으로는 학력이나 학벌이 진정한 능력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를 능력의 지표로 명백하게 인정하고 있다. 학력주의는 능력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시험주의와 맞닿아 있다. 시험은 개개인의 역량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기준으로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등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능력 평가의 가장 중요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문제는 일부 시험의 경우 합격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불합격자는 따라잡을 수 없는 보상, 즉 특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실제 나타나고 있는 능력주의는 일종의 ‘위장된 신분제’의 모습을 띤다. 대학 입시나 기업 공채, 로스쿨 등의 기회는 형식적으로는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부모의 지원 여부, 사회 경제적 조건 등에 따라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학교는 능력주의를 생산하는 공장
‘염치’ 배울 기회 줘야
초·중·고를 거치며 능력주의, 학력주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체화된다고 했다.
학교 성적의 등수를 가리키는 ‘석차’는 일제강점기부터 쓰인 용어로 1등부터 꼴등까지를 성적순으로 앉히는 데서 유래했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고 성적대로 우열을 나눠 대한다는, 민주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 사고방식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당연하게 통용되고 있다.
성적은 개인의 역량 중 일부일 뿐이다. 우월함과 열등함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아이들은 성적에 의해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로 길들여지고 있다.
학업 역량이 뛰어난 학생은 ‘학교의 입결을 빛낼 특별한 존재’로 다뤄진다. 고등학교 시기, 공부를 꽤 잘했다. 친구들과 사고를 치면 난 바로 사면(?)되고 성적 나쁜 내 친구들은 정학을 당했다. 대다수의 중·고등학교에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행해졌다. 지금도 그리 변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가정에서는 어떤가? 공부하느라 스트레스 받아서, 예민해서 등의 이유로 다 감싸주지 않았나? 잘못하면 혼도 나고 반성도 해봐야 하는데 죄책감을 느끼고 성찰할 ‘염치’를 배울 기회를 원천 차단하고 있는 거다. 단지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소위 최고 지도층인 엘리트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태연한 이유, 사법고시 합격자들의 전관예우에 대해 ‘전관비리’라는 비판이 그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하면 과장일까?
10대와 가장 가까운 20대가 특히 공정에 민감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괴물이 된 20대’라는 말처럼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을 청년 세대만의 유별난 특성으로 여기곤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언론이 만들어낸 편견이라는 것이 옳겠다. 어떤 자료에도 현 10대와 20대가 기성세대보다 능력주의, 공정성에 민감하다는 결과가 도출된 적이 없다. 2021년 KBS 세대 인식 조사 자료에 따르면 청년 세대의 지표가 기성세대보다 오히려 더 낮게 나왔다. 다만 청년 세대는 기성세대에 비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SNS 등에도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올려 공론화하기도 한다. 보여지니 많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반 급훈이 ‘4시간 자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였다. 이게 뭘 의미했겠나? 시험주의, 능력주의로 사람을 나누는 사고방식은 기성세대에게도 당연시되던 거였다.
여전히 이 땅의 수많은 학부모들이 자녀가 ‘개천의 용’이 되길 꿈꾸며 ‘투쟁’하고 있다.
능력주의는 용이 되지 못한 이들의 열패감과 억울함을 동력으로 삼아 자라는 ‘괴물’이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억울하면 출세하라’가 되겠다. 1%도 되지 않는 ‘개천의 용’을 향한 질주 때문에 99%의 삶이 피폐해지는 사회는 정당하지 않고 생산적이지도 않다. 용이 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능력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
이제 ‘불평등’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껏 특권을 쟁취하는 과정의 공정에만 예민하게 반응하고 특권 자체를 줄이는 데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했다. 특권을 그대로 둔 채 부패와 불공정에 분노하는 것은 썩은 음식을 한 곳에 쌓아두고 벌레가 꼬인다고 역정 내는 것과 같다.
능력주의가 작동하면 할수록 미래 세대의 좌절감은 커지게 된다. 또한 사회적 부담과 비용도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부모 세대의 노후까지 위협하는 사교육비를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환상을 한 번에 걷어내기 어렵다면 눈에 보이는 ‘누가 봐도 특권’인 것들부터 줄여나갈 구체화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학업에 지쳐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네가 느끼는 고통과 힘듦은 결코 네 탓이 아니다’라고 말해주길 바란다. 그래야 이 땅의 청소년들이 포기가 아닌 변화와 성장을 선택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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