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 정부는 대학 교육 혁신 방안 중 하나로 무전공 선발 확대를 제시했다. 쉽게 말하면 대학 입학 후 전공을 선택하는 제도다. 이 같은 정부 정책에 대학가, 특히 인문대학의 반발이 거세다. 취업에 유리한 응용 학문의 선호도가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무전공 선발 확대는 인문대학을 더 위축시키고 인문학의 위기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서울대 인문대학장 강창우 교수 역시 무전공 선발 확대는 그 취지와 달리 일부 학과로의 쏠림 현상을 심화시킴으로써 기초 학문 분야의 인재 부족과 연구의 질 저하를 초래해 결국 기초 학문의 고사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를 만나 인문학의 위기와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취재 정나래 기자 lena@naeil.com
사진 이의종
강창우 교수는 1996년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임용된 이후, 학내에서는 인문대학 학생부학장과 국제화지원센터장, 수도권대학 특성화사업단(CK사업단) 단장, 기획부처장, 평의원회 환경문화복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 인문대학장과 전국국공립대 인문대학장협의회장을 맡고 있다. 학외에서는 한국텍스트언어학회장, 한국독일어교육학회장, 대한의료커뮤니케이션학회 감사, 독일의 IDS 국제학술위원 등을 역임한 후 현재 한국독어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Q.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의 위기’가 심화되는 원인은?
여러 원인이 있다. 일단 잘못된 교육 정책이 시발점이다. 1980년대 초 ‘졸업 정원제’ 의 도입으로 대학들은 늘어난 정원을 인프라가 덜 필요한 인문 계열에 집중 배정했다. 그 결과 대학 인문 계열 정원이 두 배 가까이 늘고, 학과도 대폭 신설됐다. 1980년에는 28개에 불과했던 독어독문학과가 졸업정원제 시행 후 5년 사이에 40개 증가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후 1990년대 초, ‘대학설립준칙주의’가 도입돼 신설 대학이 난립했다. 또 한 번의 공급 과잉이 발생한 셈이다. 사회의 수요를 고려하지 않고 정치적 이유로 대학·대학원 졸업자가 과잉 공급됐기에 취업이 어려웠다. 이를 본 후속 세대는 인문학 연구자의 길을 선호하지 않게 됐고, 인재 확보가 어려워진 우리 인문학은 더 큰 난관에 부딪히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두 번째는 중장기적인 학술 정책의 부재다. 인문학의 위기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20여 년 전부터 인문학의 사회적 효용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경제 성장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급격히 확산시켰고, 사회를 선도하는 이데올로기 또한 바꿔놨다. 전 세계적으로 ‘부(富)’, 즉 경제적 가치를 우선하는데 이는 인문학적 지향성과는 궤가 다르다. 물질적인 부의 창출에 사회가 집중하면서 비물질적 가치를 강조하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은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다. 특히 우리나라는 경제 성장이 빨랐던 데다 IMF로 인해 고용 불안정성과 성과주의가 더 커졌고, 최근엔 인공지능 등 과학과 기술이 세계를 주도하면서 순수 학문의 자리는 좁아졌다.
학문도 생태계다. 시대에 따라 단기적으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나타날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이를 맞춰주는 게 정책이다. 개인이나 개별 대학의 노력으로 해결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하이테크 산업 시대로 나아가는 지금, 상상력과 창조력이 관건이다. 이는 인문학적 소양에 바탕을 둔다. 한데 우리나라는 인문학적 역량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육성하려는 노력이나 사회적 투자는 매우 미미하다. 우리나라의 R&D 현황을 보면, 전체의 1.2~1.3%만 인문사회 분야에 배정된다. 선진국은 최소 5배 이상 투자한다. 이 같은 학술 정책의 부재와 지원 부족이 인문학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박한 상황이다.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선 지금, ‘문송’한 현재는 부끄러운 일이다. 인문학을 지원하는 학술 정책의 수립·추진이 절실하다.
★ 졸업 정원제: 졸업 정원보다 30% 많은 학생을 선발하고, 증원된 인원만큼 중도 탈락시키는 제도. 대학 진학 수요가 급증하며 사교육 문제가 불거지자, 입학은 쉽되 졸업은 어렵게 하는 서구의 교육 제도를 본떠 들여왔다.
★ 대학설립준칙주의: 교지, 교사, 교원, 수익용 기본재산 등 최소 설립 요건을 갖추면 곧바로 대학 설립을 인가하는 제도.
Q. 서울대 인문대학은 2023년 초 ‘인문대중장기발전계획위원회’를 구성했고,
지난 11월에 초안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현재 진행 상황을 설명한다면?
외부에선 논술, 한국학과 등 새로운 전형 방법과 모집 단위에 주목했지만, 핵심은 인문대학 내 학과 체제의 발전적 변화에 있다. 50년간 유지된 학과 중심 학사 구조를 필요에 따라 학부 단위로 묶어 현재 학과 체제가 안고 있는 어려운 점들을 완화 혹은 해소하고, 학생들에게는 다양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요체다. 국제화 교육 강화를 포함해 인문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법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사실 서울대가 학부제를 폐지한 2008년 이후에도 인문대학은 광역, 즉 인문대학 내 무전공으로 선발해왔다. 현재 신입생의 50%를 무전공으로 모집 중이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고 기초 소양이 있는 학생이 대학 수업을 들어보고 전공을 선택하면 학생은 진로선택 면에서 시행착오를 줄이고 대학 입장에서도 전공에 적합한 학생을 교육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편, 오랜 숙원이었던 인문학도서관 신설 및 대학원생 연구실 부족 문제 해소, 실험 연구 분야 증가로 인한 실험실 수요 증가 등에 따른 공간 확보를 위해 인문대학 3개 동의 증축을 추진 중이다. 지난 2월에 대학본부에서의 심의가 마무리돼, 내년에 시공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Q. 정부의 무전공·자율전공 선발 확대에 대해 국공립대 인문대학을 대표해 우려 입장을 전달했는데?
무전공 선발과 비슷한 광역 선발을 10여 년간 운영해보니 장단점이 뚜렷하다. 장점은 학생들이 대학에 와서 자신의 적성을 고민해보고 진로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단점은 쏠림 현상이다. 지원자가 집중된 학과와 공백이 생기는 학과가 해마다 나타난다. 입대나 어학연수 등을 이유로 한 휴학 인원을 고려하면 정상 운영이 어려운 학과가 생긴다. 학문에 뜻을 둔 대학원 진학자의 수도 적다. 특히 2022학년 수능 체제가 바뀌면서 자연 계열 지망생들의 ‘문과 침공’이 시작된 후 중도 이탈자가 급증했다. 2021년까지 3~5명 정도였던 신입생 자퇴자가 2022년 10명, 2023년 17명으로 늘었다. 휴학도 비슷한 패턴으로 늘어서 매우 우려하고 있다.
무학과 선발 확대는 이런 문제를 더 심화할 것으로 생각한다. 서울대 자율전공학부의 경우 컴퓨터공학부, 경제학부, 경영대학 이 세 곳에 선택이 집중된다. 실제 이번 학기 전공 신청 현황을 보면, 140여 명 가운데 인문대학 전공 선택자는 4명뿐이다. 복수전공이 가능해 전공 한 개 정도는 취업과 무관하게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데도 결과가 이렇다.
현재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무전공 모집 제도가 확대되면 전공 쏠림이 더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공 선택권 강화라는 취지보다, 선호 학과 진입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대학은 여러 부작용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선호 학과는 강의실 확보 등의 어려움으로 교육의 질을 담보하기 어려워지고, 기초학문은 학생이 부족해 운영은 물론, 해당 학문의 유지·발전이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경영적 관점으로 대학 교육에 접근할 것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학문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방안을 고민하고 미래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어떻게 교육해 공급할 것인지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기업에 필요한 실무형 인재 배출은 물론, 학문을 발전시킬 연구 인력 양성 또한 대학의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학문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천천히 발전하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은 눈앞의 성과에 급급해 갈수록 기초 학문의 기반이 취약해지고 있다.
기초 학문이 뒤처지면 선도 국가로 나아가기 어렵다. 특히 우리나라는 유례없이 인구가 급감하고 있다. 인간이 가장 유효한 자원이라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양성, 고르게 발전시켜야 하는데 특정 분야에만 집중하면 왜곡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지금은 발전이 너무 빠르다. 코딩 인력 수요가 급증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챗GPT가 대부분의 코딩을 대신해준다.
지금 산업계에서 필요로 한다는 인력이 대학 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할 때도 여전히 수요가 있을지 담보할 수 없다. 반면 대학에서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독어독문학, 불어불문학의 경우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연합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경제·군사 강국이고, 두 나라의 학문·문학·예술이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당 나라의 문학·언어·문화를 연구할 가치는 여전하다. 이런 점을 고려해 교육계 산업계 그리고 정부가 함께 머리를 맞대 보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정치적 입장을 초월해 장기적으로 추진하는 시스템도 마련해야 한다.
Q.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진행되는 인문학 교육에 대해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결국 대학 입시가 문제다. 좋은 정책을 선보여도 초등학생에게 고교 수학 선행학습을 시키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인문학 소양을 기를 틈이 없다. 게다가 지금은 스마트폰과 같이 학생들의 관심을 빼앗아갈 매체가 너무 많아 긁을 읽거나 사색할 여유도 없다. 책조차 요약본을 보고, 동영상도 2분 안팎의 숏폼을 찾으니 긴 텍스트를 접한 경험이 부족하다. 때문에 대학 진학 후 어려움을 겪는다. 서울대 인문대학 발전위에서 논술을 검토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읽고 쓰는 역량을 보완할 방법을 강구하다 논술을 살폈는데, 입시가 엮이니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돼 안타까웠다.
우선 매체의 유혹에서 벗어날 환경, 얼굴을 마주하고 의사소통할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알고리즘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경험도 필요하다. 인문학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생각하고 소통하며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는 것이 핵심이다. 만들어진 정보를 받기만 하면 스스로 무언가를 생산해내기 어렵다. 스스로 사고하고 상상하고 선택하는 훈련을 학교에서 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디지털 교육의 효과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다양한 디지털 매체가 수업에 활용되면서 학생들이 스마트 기기를 더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학생들이 디지털 매체에 지나치게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교육 방법을 고민해봐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경제력으론 세계 열손가락 안에 꼽힌다. 군사력도 만만찮다. 선진국의 위상을 유지하고 국제사회에서 발언권과 영향력을 높이려면 학문적으로도 세계를 선도할 수 있어야 하고, 세계의 인문학도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첨단 과학 기술이 주도하는 사회에선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물질적인 부분을 넘어 정신문화를 육성하는 데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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