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학년’은 곧 나이를 의미한다.
8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해 20살이 되고 얼마 안 돼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정말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같은 학년’이기 때문. 하지만 네덜란드에서는 학년이 나이와 일치하지 않는다.
상급 학년일수록 유급 비율이 높은 데다 시작점도 제각각 다르다. 모든 아이들은 만 5살이 되면 초등학교에 반드시 입학해야 하는데, 부모의 선택에 따라 1년 먼저 입학할 수도 있다. 자녀의 상황에 맞춰 입학 시기를 선택할 수 있는 셈이다.
초등학교 8년, 바뀌지 않는 학급
네덜란드 학제는 초등 8년, 중·고등 4~6년이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졸업 학년인 8학년까지 반이 같다. 학년마다 선생님과 교실만 바뀔 뿐 친구들은 그대로다. 학부모들도 새 학기, 새 학년이라고 달리 준비할 것이 없다. 초등학교는 교과서부터 준비물, 필기구까지 학교에서 제공해줘 챙길 것이라곤 도시락 정도다.
중학교에 진학하면 상황이 좀 달라진다. 아이들은 새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스스로 챙겨야 할 것이 늘어난다. 중학교에 입학하면 학년이 바뀔 때, 학급에도 변화가 있다. 3학년까지는 같은 반을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나 성적에 따라 반을 옮기는 상황도 발생하기 때문.
또 3학년 말, 즉 중 3에서 고 1로 올라갈 땐 수강 과목에 따라 새로운 반으로 편성된다. 네덜란드 학생들은 문화와 사회(C&M)와 경제와 사회(E&M), 자연과 건강(N&G), 자연과 기술(N&T) 등 네 계열 중 하나를 선택한다. 계열마다 필수 과목이 다르고, 제2외국어·미술·철학·음악 등도 추가로 선택하는데, 이로 인해 각 학생의 시간표가 달라진다. 수업마다 반 구성이 조금씩 달라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지만, 1년 동안 같은 수업을 들어도 그 외 시간에는 만날 일이 없어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친구도 많다. 이 때문에 교사의 부탁으로 시험지를 나눠줄 때면 학생들이 고역을 치르기도 한다.
또 중학생부터는 규정상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등교하고, 도시락까지 챙겨야 한다. 딸아이도 중학생이 되면서 도시락을 직접 싸가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고2인 현재 아침식사를 하고 나가기도 바빠서 도시락 싸는 일은 내 몫이 됐다. 하지만 딸의 친구들은 매일 아침 직접 자기 도시락을 챙긴다고 들었다. 자기 일은 스스로 해결한다는 네덜란드인들의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교과서 반납 대비한 ‘표지’ 작업 중요
또 하나 재밌는 것은 신학기 교과서 표지를 씌우는 학생들의 모습이다. 네덜란드에서는 학부모들의 경제적 부담을 낮추고, 환경도 보호하는 차원에서 2009년부터 교과서 대여 시스템을 마련했다. 여름방학 중에 각자의 집으로 교과서를 받고 1년간 깨끗이 사용한 뒤, 학년말 다시 반납하는 식으로 몇 년간 재사용하는 것이다. 반납할 때 훼손이 심하면 과태료를 내야 하는데, 공부량이 대폭 늘어나는 중·고교 때 교과서는 망가지기 쉽다. 따라서 새 학기 시작 전 교과서 표지를 씌우는 일이 필수인데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예쁜 영화 포스터를 붙이는 한국 학생과 달리, 네덜란드 학생은 오로지 기능만을 고려한다.
중학교 신입생은 아침마다 앱을 꼭 확인해야 한다. 중학교부터 이동수업을 시작하는데 시간표가 변동될 때가 있기 때문. 첫 교시가 갑작스레 취소된 걸 학교에 도착한 후 알게 된 아이들은 소중한 숙면 시간을 빼앗겼다며 투정 섞인 문자를 보내오기도 한다. 마지막 교시가 취소돼 일찍 하교하는 날은 당연히 신나한다. 수업 사이에 갑작스럽게 공강이 생기면 친구와 군것질거리를 사러 가기도 한단다. 중·고등학생에게 매일 달라지는 학교 시간표에, 공강 시간까지 생긴다니 한국 학부모인 내게는 정말 신세계다.
개학 후 등교하는 네덜란드 중·고생의 발걸음은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습의 강도가 점점 세지고, 과제와 시험이 끊임없이 밀려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석차를 내지 않아 온전히 자기 성적만 유지하면 된다는 것.
또 방학 때만큼은 고등학생들까지 마음 편히 푹 쉰다. 새 학년을 앞둔 여름방학은 한 달 반 정도로 꽤 긴데 숙제는커녕 교과서도 전부 반납해 학생들은 자유를 누린다. 개학 후 몇 주간은 지난 학년에 배웠던 것을 복구해내느라 애를 먹기도 하지만, 방학 동안의 충분한 휴식은 학기중 숨 쉴 틈 없는 학업 일정을 감당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오는 9월, 고3이 되는 딸아이도 간만에 한국을 찾아 휴식을 취할 예정이다. 그런데 이 얘기를 들은 한국의 지인들은 ‘대입에 성공했구나’라고 생각했단다. 한국 상황에서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학기 내내 과한 과제와 잦은 시험에 시달렸던 아이들이 방학 동안 마음껏 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방학도 명절도 없이 끊임없이 과외로 학원으로 학교로 내몰리는 한국의 중·고등학생들이 떠올라 조금은 씁쓸해진다.
네덜란드 중·고등학생들은 아침마다 학교 앱에서 변동 사항이 없는지 시간표를 확인한 후 하루 일정을 시작한다.
1년간 빌려 사용하는 교과서를 최대한 깨끗이 사용하기 위해 포장한 모습. 최근엔 쭉 늘려 붙이기만 하면 되는 간편한 포장지도 나왔다.
네덜란드 학생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간다.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아들과 출근하는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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