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자유를 많이 주는 편이다. 초등학교까지는 학생 안전을 위해 의무적으로 학부모가 등하교 때 동반해야 한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면 이런 의무가 사라지니 부모들은 대부분 다시 맞벌이에 나선다. 사교육이 일반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하교 시간과 부모의 귀가 시간 사이 학생들은 자유를 누린다.
이때 위험천만한 유혹이 많은데, 영국 학부모들은 이런 상황에 자녀가 놓이는 것을 크게 제어하려고 하지 않는다. 경험상 누구나 거칠 ‘통과의례’이니,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학생부터는 자유(?)의 시간
영국 학부모들은 중학교 입학 후 학교생활을 온전히 자녀에게 맡긴다. 더 이상 학교를 찾지 않으니, 자녀가 어떤 친구들을 만나는지, 학교생활은 어떤지는 스스로 말해주지 않으면 알 방법이 없다. 1년에 두 번, 개별 과목 교사들과 각각 상담을 하지만 5분 안팎이라 학교생활에 관해 듣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영국 중·고등학생들은 하교하는 오후 3시경부터 부모가 귀가하는 오후 5~6시까지 마음껏(?) 자유를 누린다. 이때 많은 일이 일어나는데, 어른의 통제가 없다 보니 음주와 마약, 성 문제가 일반 가정에서 빈번히 발생한다.
특히 청소년들의 파티 문화가 놀랍다. 주말에 친구 집에 모여 파티를 많이 여는데, 대부분의 부모가 자리를 비켜 준다. 혹은 자녀를 두고 부부끼리 주말 여행을 떠난 집에 아이들이 모인다. 생일 파티를 동네의 커뮤니티 홀 등을 대여해 꽤 성대하게 치르는 경우도 많다.
이때 미성년인 아이들이 술을 가져온다. 이미 마신 상태로 오기도 한다. SNS를 통해 파티 장소와 시간이 불특정 다수에게 알려져 초대받지 않은 이들이 몰려들기도 하는데, 이 중엔 청소년 마약 딜러도 포함돼 있다. 공원에서 삼삼오오 청소년들이 모여 술과 마약을 즐기는 경우도 있다.
아연실색할 상황인데. 영국 사회는 문제로 인식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의사는 없는 것 같다. 부모나 나이가 많은 형제자매가 청소년에게 술을 사서 건네주고, 경찰은 공공장소에서 일탈 행위를 하는 청소년들을 보고도 범죄나 사고로 이어지지 않으면 따로 막지 않는다.
이는 한국과 다른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 어차피 한 번은 노출될 상황이니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여긴다. 부모 세대에서도 있었던 일인 만큼, 청소년기에 닥칠 위험도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슬기롭게 헤쳐나도록 ‘지켜보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외박을 개의치 않는 부모들
또 하나 놀란 것이 슬립오버(sleepover), 즉 외박 문화다. 영국 아이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 집에서 자고 오는 경우가 많다. 중·고등학생들도 마찬가지인데, 대부분 남녀공학이라 성별에 관계없이 서로의 집을 오간다. 아이들은 밤새 함께 영화를 보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만큼 외박이라 부르기 어렵다고 항변하는데, 부모들도 크게 개의치 않아 한다.
이민자 또는 다문화가정에서는 이같은 문화 차이로 종종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영국 부모들은 허락을 하다 보니, 또래 문화에서 소외되는 듯한 느낌과 부모의 과도한 제재를 꺼리는 아이들이 나타나는 것. 우리 집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상대 부모를 잘 아는 경우가 아니라면 새벽 1시에도 꼭 데리러 가는 나를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현지인과 다른 장점이 있음을 인정하는 만큼, 어느 정도 타협에 이른 상태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게, 영국의 청소년 문화는 좋지 않은 측면에서 많은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분명 긍정적인 면도 존재한다.
특히 내가 실제 만나고 대화한 영국의 청소년들은 세계 시민의 자세가 깊이 깔려 있었다. 입시 제도가 학교 성적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 있고, 초·중·고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주제들에 세계 정세나 지금 시대의 이슈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 영국 정치, 특히 청소년들이 성인이 돼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브렉시트 관련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선거권을 주장하기도 하고, 페미니즘·빈곤국·환경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개인의 의견을 피력하며 등교 대신에 거리에서 시위에 나서기도 한다.
영국 청소년들은 영어가 모국어인 강점을 살려 전 세계 석학들의 의견을 분석해 학교 과제인 에세이를 쓰고, 수업 시간에 열띤 토론도 벌인다. 권위적이지 않은 교사들은 아이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더욱 날카로운 비판을 독려한다.
다른 유럽 국가와 비교하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빨리 포용하는 편인 것도 이런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새로운 것에 거침없이 도전하고, 또 이를 권장하는 사회 분위기가 영국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두 나라의 부모, 그리고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 시민으로 자라고 있는 두 아이들이 세 문화의 장점을 잘 융합해 성장하기를 바란다.
1 영국의 청소년 음주 문제를 다룬 기사. (출처_www.theguardian.com)
2 영국 학교는 현재 사회 문제를 학생들이 조사·토론하는 수업이 많다. 사진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영국 정부가 8월 한 달 식비의 50%를 대신 내준 ‘식당 이용 권장 운동’에 대해 다룬 기사. 학생들은 이를 참고해 자신만의 의견을 내야 한다. (출처_finance.yahoo.com)
3 영국 학생들은 모국어가 영어라는 이점을 살려 석학들의 과제물이나 토론 자료를 만들 때 논문이나 연구 자료를 적극 참고한다. 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온라인 교재를 보게 하는 사이트 ‘global.oup.com’. Open University에서 운영한다.
영국 United Kingdom
정은미
영국 통신원
잠깐 영어 공부를 하러 찾았던 영국 런던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두 딸아이는 영국 공립학교 9학년, 11학년에 재학 중이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영국의 공립 중·고등학교 이야기를 독자와 나누고 싶다. 소소한 영국 생활은 블로그(rubykor.blog.me)에서도 공유 중이다.
2020년엔 유학생 통신원과 학부모 통신원이 격주로 찾아옵니다. 7기 유학생 통신원은 캐나다와 싱가포르, 4기 학부모 통신원은 중국과 영국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유학 선호 국가이지만 중·고교의 교육 환경과 입시 제도 등 모르는 게 더 많은 4개국. 이곳에서 생활하는 유학생과 학부모의 생생한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_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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