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황지원 교수
서울시립대학교 교육대학원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과 석사 학위와 교육사회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방송통신대 원격교육연구소, 부천대 등에 재직했으며, 현재 서울시립대 교육대학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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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반수’라는 말이 흔하게 사용된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의 노년 세대는 반수라는 말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재수, 삼수라는 말은 잘 알지만 반수라는 말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의미를 듣고 나면 ‘반수’라는 말에 담긴 재치에 헛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반수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학생들의 과도한 학업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수능 과목의 선택적 응시와 대학의 선택적 반영이 가능해졌는데, 이처럼 학생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조치가 역설적이게도 반수라는 새로운 현상을 탄생시켰다. 예전에는 다른 대학을 가려면 온전히 ‘재수’를 해야 했지만 이제는 대학을 다니면서 필요한 과목만 공부해서 더 좋은 학교로 도전하는 반수가 가능해진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반수는 재수와 달리 선택의 기회비용을 큰 폭으로 줄여줄 뿐만 아니라 혹시 실패하더라도 현재의 대학에 다니면 된다는 강력한 보험의 역할도 수행한다. 그러니 반수는 조금이라도 높은 학력에 대한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안전망 부재를 극복하려는 자구책이 빚어낸 독특한 사회적 현상이다.
이렇게 태어난 반수는 대학의 신입생 교육을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있다. 많은 저학년 학생들이 수능을 준비하고 입시철이 지나면 자퇴 의사를 밝히곤 한다. 문자 그대로 반수는 대학 공부와 입시 공부를 절반씩 해야 하지만, 실제 대학에는 학적만 걸어두고 입시 공부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 보니 1학년 대상의 교육에 대학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의 수능 재응시와 대학 이동을 통한 사회적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개인의 합리적 선택에 반하는 사회적 효과
구성원들은 언제나 특정한 제도 변화에 대해 각자 최선의 합리적 판단에 따라 행동한다. 입시 부담 완화를 위한 제도 변화에서 대중은 손쉬운 학력 상승의 가능성을 읽어냈고 반수라는 기묘한 사회적 현상을 탄생시켰다. 즉 제도의 변화가 개인의 행동을 변화시켰고 개인의 선택은 다시 사회적 현상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교육을 단지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이나 행동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인에게는 학력 상승이라는 유인가를 만족시키는 최선의 투자일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각종 교육 및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수의 전제조건은 대학의 명확한 서열화다. 대학 서열이 명확하지 않다면 굳이 다른 대학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다. 또한 그 서열이 향후 인생의 기대 소득에서도 확실한 차이를 보장해야 한다. 1~2년을 투자하더라도 나중에는 그것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여기서 생각해볼 만한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있다. 바로 ‘효과적으로 유지되는 불평등 가설(EMI)’이다. 이 가설의 주요 내용은 계층에 따른 교육 기회의 불평등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지만, 좋은 교육 기회를 확보한 상류층은 하류층이 대학에 많이 들어와서 대학 졸업의 상대적 가치가 떨어지면 대학 입학을 넘어 ‘어떤 대학에 가느냐’라는 질적 차이로 불평등을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예전에는 대졸 여부가 사회적 지위를 가르는 중요한 요인이었다면 지금은 어떤 대학 출신인지가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수험생과 그 학부모 사이에 떠도는 ‘SKY 서성한 중경외시’라는 마법의 주문이 있다. 공식적인 글에 담기는 부담스럽지만,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을 선별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들이 강화됐고 대학 서열이 마치 인생의 서열이 되는 것처럼 계급이 촘촘히 정해진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다시 반수는 개인에게 너무나도 합리적인 선택이 됐다.
최근의 ‘의치한약수’라는 단어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대졸과 고졸의 차이였던 격차의 지점이 대학 내에서 4년제와 2년제의 차이로 전환됐고 다시 4년제 내에서 명문대와 비명문대의 차이로 질적 분화를 거듭해왔다. 이제는 ‘의치한약수’라는 새로운 계층이 나타나 입시 생태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합리적 선택 응원 넘어 사회적 고민으로
최근의 의치한약수 열풍에 ‘정년 없는’ 안정적 직장에 대한 열망이 반영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EMI 가설에 따르면 상류 계층 차별화 전략일 수도 있겠지만 불안정한 세상에서 공부 좀 하는 개인의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수한 학생들이 의학 계열로만 몰려가는 현상은 창의적 인재가 필요한 미래 사회에는 국가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즉 개인의 합리적 선택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결정들이, 사회적인 맥락에서는 다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개인의 행위와 사회적 구조가 상호작용하는 역동적 공간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과 노력을 응원하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개인의 선택이 가져올 사회적 영향을 따져보고 사회적인 해결책을 고민하는 일이다. 우리가 교육 문제를 생각할 때 사회적인 관점을 겸비해야 하는 이유다.
1110호부터 학교 안팎에서 고민이 큰 중요한 교육 이슈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교육학자 12명의 릴레이 칼럼이 이어집니다. 이화여대 정제영 교수를 시작으로 강지영(성신여대 교육학과 교수) 강태훈(성신여대 교육학과 교수) 김동호(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김준엽(홍익대 교육학과 교수) 박소영(숙명여대 교육학과 교수) 박주형(경인교대 교육학과 교수) 이상무(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이한종(춘천교대 교육학과 교수) 임효진(서울교대 초등교육과 교수) 조현명(이화여대 연구교수) 황지원(서울시립대 교육대학원 교수) 등 1990년대에 교육학과에 재학하면서 함께 공부한 3세대 대표 교육학자들의 깊이 있는 분석과 해법을 만나보세요._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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