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천국 여자 지옥이라 불린 성리학의 나라 조선. 전반적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그나마 조선 초에는 여성도 고려 시대와 비슷한 지위와 권리를 누릴 수 있어서 아주 쬐~끔 재능을 펼칠 수 있었어. 그러다 (다들 알다시피) 곧 이마저도 어림없는 일이 돼버렸지만. 당시 재능 있는 여성들이 견뎌야 했던 가혹함은 상상불가였다고 해. ‘낭중지추’라는 고사성어를 들어봤니?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재능이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눈에 띌 수밖에 없다는 의미인데 말야, 오늘의 두 주인공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안성맞춤인 말은 없지 않나 싶어.
취재 김한나 리포터 ybbnni@naeil.com
사진 위키백과
1이이 맘으로만 부르면 벌금 5만 원이다!(feat. 신사임당)1
조선 후기 최고의 성리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 <초충도>로 대표되는 독보적 화풍을 창시한 예술가, 대한민국 화폐에 등장한 첫 여성. 나 신사임당을 간단히 소개하면 요 정도쯤?
조선 중기, 강릉의 명문가(노비 수만 10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지.)에서 태어난 나는 어릴 적부터 사서삼경에 통달했고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어. 내 총명함을 아끼셨던 외할아버지는 손수 학문을 지도해주셨고 아버지는 당대 최고 화가였던 안견의 <산수화>를 구해주실 정도로 이 둘째 딸의 재주를 사랑하셨지. 그림을 모사하며 얼마나 행복했던지. 이렇듯 자유로운 분위기의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난 마음껏 꿈과 끼를 발산할 수 있었단다.
19세에 아버지의 주선으로 이웬수, 아니 이원수와 만나 결혼한 뒤 셋째 아들 율곡 이이를 포함해 4남 3녀를 낳아 길렀어. 그리고 38세 때 서울 시집에 갈 때까지 근 20년을 친정에서 살았지. 남편이 집안으로 보나 가진 걸로 보나 우리 가문과 갭이 좀 커서 데릴사위로 들어온 거 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아들이 없던 부모님을 딸이 모시는 풍습은 조선 초엔 흔했단다. 게다가 그땐 아들 딸 구별 없이 동일하게 재산을 나누어 받았고 부모님 제사도 아들과 딸이 돌아가면서 지냈거든? 물론 내 남편이 좀 찌질이… 쉿! 여기까지.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불리는 건 고맙지만 한편으론 참 씁쓸한 일이야. 그런 이미지에 날 가둔 이는 바로 조선 후기 노론의 우두머리였던 우암 송시열이란다. 당시 그가 속한, 주류였던 서인 세력이 영웅처럼 모신 사람이 내 아들 이이거든. 서인들은 유교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세우고 그 틀에 날 끼워 맞췄어. ‘현명한 어머니, 어진 아내’이기 이전에 나 사임당은 유교 사회에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자주적인 삶을 살았고 뛰어난 화가로서 널리 재능을 인정받았지. 이쯤 되면 <82년생 김지영>처럼 ‘1504년생 신사임당’으로 불러줘야 하는 거 아냐?
1중국과 일본에서 K-시(詩) 열풍 일으킨 주역(Feat. 허난설헌)1
1571년 어느 날,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라는 웬 무협지 제목 같은 시 한 수가 조선 문단을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발생했어. “뭐? 8살짜리 꼬맹이가 이걸 썼다고?” “초당 허엽 선생 딸내미 작품이래~” “역시 천재 집안이라 다르네, 달라.”
내 이름은 허초희, ‘난설헌’이라는 호로 더 유명하지. 강릉의 명문가였던 우리 집안은 아버지를 비롯해 남매가 모두 문장에 뛰어나 ‘허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 불렸어. 양반 가문에서조차 여성의 교육을 금하던 암흑 같은 시대였음에도 아버지는 내게 맘껏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 특히 12살 많은 둘째 오빠 허봉은 시에 두각을 나타내는 날 위해 최고의 스승을 모셔다줄 정도로 이 여동생을 아끼고 사랑해주었단다.
사임당 언니 때와는 다르게 조선 중기 이후부턴 결혼을 하면 거의 모든 여자가 바로 시집에 가서 살아야 했어. 15세… 그 어린 나이에 김성립이라는 인간이랑 결혼한 나도 예외는 없었지. 시집살이는 참 고됐어. 시댁 어른들은 내가 똑똑해서 남편이 기를 못 편다며 구박했지. 의지할 사람은 남편뿐이었지만 그도 날 사랑하지 않았어. 난 늘 지인들에게 3가지 한이 있다고 말했어. 조선에서 태어난 것, 여자로 태어난 것, 이백이나 두목(중국 당 시대의 유명한 시인들이지.) 같은 남편을 만나지 못한 것.
그렇게 좋아하고 의지했던 친정아버지와 허봉 오빠가 죽고(이이의 탄핵을 주장하다 귀양을 가 건강을 잃었거든. 사임당 언니와 난 얄궂은 인연이네.) 사랑하는 딸과 아들마저 저세상으로 보낸 뒤 살 희망을 잃어버린 난 27세에 죽음을 맞이했어. 짧은 생을 마감하며 ‘내 글을 모두 태우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홍길동전>의 저자인 동생 균이가 내 시를 외우고 있다가 <난설헌집>을 남겼지.
뜻밖에도 <난설헌집>은 중국 명나라로 건너가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후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어. 하지만 균이까지 역모 혐의로 죽게 되자 내 시집도 조선 땅에서 모두 불태워 사라졌단다. 재미있는 사실은 내 시가 1692년, 죽은 지 103년이 지나 일본에서 역수입됐다는 거야. 훗날 정조 임금도 이를 읽고 감탄했다지. 가끔 내가 고려 시대나 조선 초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그럼 조금은, 아주 조금이라도 덜 아프지 않았을까 하고 말야.
‘지금까지 이런 TMI(too much information)는 없었다!’로 시작한 ‘알아두면 있어 보이는 TMI’. 독자 분들의 요청에 다시 시작합니다. TMI 시즌 2는 “재밌게 읽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도움까지 됐다”는 말에 ‘어쩌면 쓸모 있을’을 타이틀로 삼았습니다. 과학, 문학, 역사, 예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세기의 라이벌들로 재밌게 풀어볼 예정입니다. 그저 즐겁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_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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