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6월, ‘남극점 정복’을 목표로 두 나라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어. 청코너~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 홍코너~ 영국의 로버트 스콧! 그런데 이것 좀 보게, 아문센 팀은 개가 썰매를 끌고 털가죽 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데 반해 스콧 팀은 썰매 운전수가 조랑말을 타고 메이드 인 잉글랜드 공장표 모직 옷을 입었잖아! 저러다 일 날 것 같은데. 저… 스콧씨, 빙판에서 조랑말이 안녕할까요? 네? 댕댕이 보호법이 아동 보호법보다 먼저 제정된 영국에서 개썰매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라고요? 그럼 옷이라도 따뜻하게 입으시지…. 영국 신사가 야만인의 추한 옷을 입을 수는 없다고요? 아, 네~ 저는 소랑 이야기 나눌 테니 일단 출발하시죠.
취재 김한나 리포터 ybbnni@naeil.com
사진 위키백과
“친애하는 스콧 대령님께.
당신이 우리 다음으로 이 지역에 도착한 첫 번째 사람이 될 것 같으므로
이 편지를 호콘 7세께 발송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텐트에 남아 있는 물건들 중에서 쓸모 있는 것이 있으면 부담 가지지 말고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무사히 귀환하시기를 빌며.”
_ 로알 아문센
최고의 탐험가 아문센
난 인류 최초로 남극점과 북극점을 정복한(?)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이야.
어릴 적부터 드넓은 세상을 꿈꾸며 모험 가득한 삶을 동경했던 난 북극점에 최초로 두 발을 내딛는 탐험가가 되겠다는 확고한 인생 목표를 세웠어. 고된 탐험에 걸맞은 강인한 체력을 키우기 위해 스키·축구·달리기 등 각종 스포츠를 섭렵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듯 북극점에 도달하려면 북극이란 지역이 어떤 곳인지 알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1903년, 탐험대를 꾸려 북서항로(유럽에서 서북으로 항해해 태평양과 아시아를 잇는 항로)개척에 나섰어. 역시 난 타고난 탐험가였지 뭐야. 출발한 지 3년 만에 16세기 후반부터 제국주의 열강들이 수없이 도전했지만 찾지 못한 바닷길, 북서항로를 최초로 개척해 냈다는 거 아니니.
어디 그뿐인가? 북자극의 위치 확인과 북동항로 항행, 북극점 상공을 통과하는 횡단비행에도 성공했고. 게다가 그 과정에서 극지방에 사는 원주민들과 교류하며 맹추위에서 살아남는 ‘극지방 생존법’을 배우기도 했어. 완벽해! 이제 준비는 끝났어! 꿈의 북극점으로 고고! 그런데 왓!? 미국의 피어리가 이미 북극점을 접수했다고? 안~돼~!
탐험가에게 중요한 건 오직 ‘최초’라는 왕관뿐이야. (기가 막힌 건 피어리가 사기를 친 게 나중에 밝혀졌다는 거야. 북극점에 간 적도 없는 녀석이 전 인류를 기만하다니! 난 죽어서야 내가 남극점은 물론 북극점까지 최초로 밟은 인간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니까~)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은 난, 어쩔 수 없이 남극점으로 목표를 바꾸게 됐어. 웃긴 건, 보잘것없는 국가(?)의 ‘듣보잡’ 탐험가가 북서항로를 개척해서 영국이 단단히 열받았다나? 그래서 나를 꺾으려고 스콧이라는 해군대령을 남극점에 보내기로 했다나? 결국 우리 두 팀은 남극에 각각 베이스캠프를 차렸지. 그래도 탐험가라는 동질감 때문에 경쟁 상대임에도 준비 기간 동안 서로를 응원하기도 했고 도움말을 건네기도 했어.
하지만 스콧은 털가죽 옷을 입고 개썰매를 끄는 우릴 한심하게 생각하더라고. 최첨단 기술력을 보유한 영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렇게 으스대더니만, 에휴~ 마지막 나의 호의마저 뿌리치더니 결국 스콧과 그 팀원은… 눈물이 난다.
준비와 전략에서 뒤진 스콧
이게 누구 놀려? 죽을힘을 다해 간신히 남극점에 도착했건만 우리를 맞이한 건 노르웨이 국기와 아문센이 쳐놓은 텐트, 남겨둔 장비, 식량, 그리고 호의를 가장한 이 네 가지 없는 편지뿐이로구나. “굶어 죽더라도 네 놈 물건은 한 개도 취하지 않겠다!”고 하고 싶지만 팀원 보워스가 장갑 한 짝이 없어져 몹시 괴로워하므로 그거 하나만 챙기는 걸로… 에잇, 기분 나빠.
돌아갈 길이 막막하구나. 조랑말들은 오다가 다 죽었고 (개는 잡식성이라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데 얘들은 건초만 먹고, 개는 썰매를 끌어도 땀이 안 나는데 얘들은 털이 짧은 데다 땀을 흘리니 금세 얼어죽더구먼!) 게다가 주 식량원인 통조림은 다 얼어서 터지고 말이지. 출발 전 아문센 녀석이 바다표범을 잡아먹는 게 좋을 거라 권했을 때 미개인이라고 놀려댔건만.
며칠 뒤 에번스가 죽었어. 동상에 걸려 잘 걷지 못하던 오츠도 자신이 동료들에게 짐이 되는 게 싫다며 혼자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 윌슨과 보워스도 끝내 내 곁을 떠났어. 나도… 더 이상 견딜 힘이 없구나.
영국, 1등보다 유명한 2등 만들기 대작전!
스콧의 패배를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영국 정부는 스콧의 우상화와 더불어(아문센의 충고도 무시한 채 고집부리다 대원들도 못 챙긴 주제에 쓸데없이 글은 잘 써놨다나? 근데 그게 또 낭만주의 시대라 통했다나 뭐라나?) 아문센 깎아내리기에 온 힘을 기울였어.
스콧의 ‘신사적인 아마추어 정신’과 비교할 때 아문센의 세심하고 꼼꼼한 ‘전문가 정신’은 비겁하고 하찮은 것이라 매도했다지? 게다가 스콧이 먼저 남극점을 정복했다는 거짓된 내용을 10년간이나 자국 역사 교과서에 싣기도 했고. 영국의 발악 덕(?)에 지금까지도 남극점에는 아문센과 스콧의 이름이 같이 새겨져 있고 미국 기지는 ‘아문센-스콧 남극점 기지’로 명명돼 있어. 흠, 스콧이 승리했다면 아문센의 ‘아’ 자도 남기지 않았을 거면서 말이지!
“우리는 끝까지 버텨볼 생각이다. 하지만 몸이 점점 쇠약해져서 이제 끝이 멀지 않았다.
정말 안된 일이다. 나는 더 이상 쓸 수 없다.”
_ 로버트 스콧
추신 - 신이시여, 우리 국민을 보호해주소서.
“그들은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 편안한 여행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처럼 사람이 비참하게 썰매를 끌어야 하는 여행은 하지 않은 것 같다.”
_ 오츠의 일기
‘지금까지 이런 TMI(too much information)는 없었다!’로 시작한 ‘알아두면 있어 보이는 TMI’. 독자 분들의 요청에 다시 시작합니다. TMI 시즌 2는 “재밌게 읽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도움까지 됐다”는 말에 ‘어쩌면 쓸모 있을’을 타이틀로 삼았습니다. 과학, 문학, 역사, 예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세기의 라이벌들로 재밌게 풀어볼 예정입니다. 그저 즐겁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_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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