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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

905호

알아두면 있어 보이는 TMI 5 마리 앙투아네트
내가 언제 빵 없으면 케이크 먹으랬어?

억울함의 아이콘, 마리 앙투아네트

6살 남짓 된 천재 피아니스트가 오스트리아_헝가리 제국의 여제(女帝)앞에서 연주를 한다. 환상적인 연주가 끝난 후 이 어린 연주자는 감동의 눈빛을 보내는 여제에게 다가가다 그만 넘어지고 만다.
그 모습을 보고 얼른 다가와 “괜찮으신가요?”하며 어린 연주자를 일으켜 세운 배려심 넘치는 꼬마 공주. 아름답고 상냥한 공주의 모습에 반한 이 어린 연주자는 “내가 크면 당신과 결혼하겠어요!”라고 겁도 없이 외친다. 모차르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다.
취재 김한나 리포터 ybbnni@naeil.com 참고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공부는 싫지만 난 얼굴도 마음도 예쁜 꼬마 공주
안녕? 난 오스트리아의 앙투안 공주야. 누군지 모르겠다고? 그럴 수도 있어. 내 이름은 훗날 프랑스로 건너가 앙투아네트로 바뀌거든. 우리 엄마는 그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여제란다. 오스트리아의 국모(國母)로 불리는 분이지. 엄마는 늘 막내딸인 나를 걱정하셨어. “이 아이는 뭔가 진지하지만 귀찮을 것 같은 주제에 대해서는 생각하려고도, 행하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사람들 앞에서 토로하실 정도였지. 내 귀차니즘을 간파하신거야. 결과적으로 난 공부에선 열등생을 벗어나지 못했어. 그러면 좀 어때? 난 누가 봐도 예쁜 외모에 상냥한 마음씨의 소유자인걸. 너희들, 갑자기 나한테 호감이 확 느껴지지 않니?





프랑스어 공부가 젤 싫은데 프랑스로 시집가래
당시 유럽의 왕실에서는 왕실 간 결혼으로 동맹 관계를 강화하곤 했어. 10명의 언니들도 이웃나라 왕비나 공작부인이 됐지. 아직 미혼인 언니 엘리자베트는 결혼시장 최고의 신붓감이었어. 우리 자매 중 독보적으로 예뻤거든. 엄마는 언니를 프랑스 루이 15세에게 보내려고 마음먹었단다. 프랑스 같은 강대국과 관계를 돈독히 맺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야. 그런데 웬걸, 그 예쁜 언니가 천연두에 걸리더니 얼굴에 흉터가 가득 생겼어. 결국 언니의 결혼은 무산됐고 내가 프랑스로 가게 됐어. 싫다고 우는 내게 엄마는 신랑이 될 프랑스 왕자의 초상화를 보여주시며 얼마나 잘생겼냐고 나를 달랬지. 어라? 좀 괜찮은 거 같더라고. 난 눈물을 닦았지.





초상화 뽀샵한 인간 잡아와
1770년, 드디어 양국 간 합의가 이루어졌고 나와 루이 16세의 혼례가 진행됐어. 초상화에 그려진 왕자를 상상하며 그를 본 순간 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 내 두세 배는 되는 덩치에다 숫기라고는 없고 나중에 보니 취향도 나와 전혀 맞지 않았거든. 생각해봐. 먼 이국땅에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모두의 감시를 받으며 사는데 남편도 맘에 안 드는 삶이라니. 궁정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계집애’라고 공공연하게 비웃으며 나를 비하하는 전단을 돌려보고 낄낄댔지. 스트레스는 쌓여갔고 난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어. 숨 쉴 수 있는 장소 말야. 남편이 날 위해 작은 궁전을 선물했고 난 그 곳에 틀어박혀 농사도 짓고 소박한 삶을 살았단다. 그러나 말 많은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에서 온 여자가 비밀 궁전에 숨어 프랑스 황실의 돈을 거덜내고 있다며 소문을 냈지. 엄마… 왜 날 여기로 보내셨어요?





억울한 ‘목걸이 사건’으로 프랑스 국민 밉상으로 등극
그래도 열심히 살아보려 아이들도 낳고 부부 사이는 많이 좋아졌어. 하지만, 정치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졌지. 결정타는 프랑스의 미국 독립전쟁 개입이었어. 재정이 극도로 악화된 거지. 부유한 귀족과 교회는 면세 혜택을 누리고 가난한 농민들에게서만 더 많은 돈을 쥐어짜려니 문제가 해결되겠니? 남편은 어떻게든 귀족과 교회를 설득하고자 했지만 그들은 완강히 거부했고 우리는 좌절했어. 그들은 되려 외국 출신 왕비가 낭비벽이 심하다고 소문을 냈지. 내 소비 수준은 다른 왕비들에 비해 소박했는데도 말야. 이런 상황에서 목걸이 사건이 터졌어. 재상이 되고 싶어 한 로앙 추기경과 라모트 백작부인이라는 사기꾼이 가짜 목걸이를 엄청난 액수에 거래하고 내 탓으로 돌린 거야. 난 알지도 못하는 목걸이 때문에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됐어. 그게 내 본모습이라나? 내가 결백하다고 외쳐도 그 누구도 귀기울여 주지 않았어. 난 절망했지. 결국 1789년, 혁명이 일어났고 우리 가족은 프랑스 탈출을 결심했단다.





나는 방금 사형 선고를 받았어
우리의 탈출은 실패했어. 하늘도 우리를 돕지 않았지. 남편은 먼저 단두대(기요틴)에서 반역죄로 처형됐고 나는 그 소식을 감옥에서 들었단다. 간수들은 내 아이들을 때리고 외설적인 욕설을 시키며 웃어댔지. 사형 선고를 받은 난 수레에 태워져 프랑스 사람들의 야유와 욕설, 돌팔매질을 당하며 처형장으로 끌려갔단다. 손이 묶인 채로 단두대 계단으로 끌려 올라가다가 날 부축하는 남자분의 발을 밟고 말았어. “미안해요, 선생님.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잊혀지지가 않네. 아마도 그도 나를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녀로 알고 있었나봐. 나는 울지 않았어. 두려워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어. 담담히 죽음을 맞이했지. 얘들아, 하나만 알아줄래? 난 자유로운 꿈을 꾸던 소박한 영혼을 지닌 여인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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