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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4호

EDU CULTURE | 알아두면 있어 보이는 TMI 36

드넓은 가슴의 소유자 ‘피자’의 세계 정복기

‘전 세계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음식은 단연코 나!’라고 하고 싶지만 대한민국에서만큼은 ‘치느님’에게 이미 왕좌의 자리를 내준 지 오래라 말 꺼내기가 좀 뻘줌하구먼. 하지만 뭐 그렇다고 서운하진 않아. 난 누구보다 개인적 취향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포용의 아이콘이거든. 내 도우(dough)에 담기는 각양각색의 재료들을 보라고! 나라·지역·인종별로 그 어떤 것을 올려도 난 그 모두를 따뜻이 품어내 훌륭한 요리로 탄생시키지.
300년 가까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포용의 아이콘, 나 피자님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려줄게.

취재 김한나 리포터 ybbnni@naeil.com
참고 <세상을 바꾼 음식 이야기>



# 간이 접시로 쓰인 빵 그릇 ‘피자’

내 최초의 조상은 고대 시리아에서 탄생했어. 그분의 존함은 ‘피타’였다고 해. 나를 비롯해 케이크와 파이의 선조이기도 하지. 피타는 효모로 밀가루를 발효시켜 만든 동그란 모양의 넓적한 빵이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그릇 삼아 그 위에 음식을 올려 먹었어.

훗날 피타는 그리스로 전파됐고 그리스인들은 그 위에 올리브 오일, 치즈, 허브 등을 얹어서 먹곤 했지. 피자의 종주국은 이탈리아라고 알고 있는데 뭔 시리아랑 그리스 얘기만 하고 있냐고? 자, 크게 한숨 들이마시고 Inner peace~.

기원전 7세기, 그리스는 이탈리아 남부로 진출해 도시를 건설했어. 그리고 이곳을 새로운 도시, ‘네아폴리스’(현재의 나폴리)라 불렀지. 그리스인이 진출했으니 당연히 그들의 음식 문화도 함께 갔겠지.

그 후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게 되고 그릇과 접시의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피타의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지고 말아. 18세기 중반에는 나이프, 포크, 스푼을 이용한 식사법이 유럽 전역에 퍼졌고 사람들은 더 이상 빵을 그릇 삼아 손으로 음식을 먹지 않게 됐어.



양파와 후무스를 올린 ‘피타’. ※사진 출처_ 위키백과


# 빈민의 음식, 여왕을 위한 요리가 되다

18세기에 나폴리는 ‘빈민의 항구 도시’로 불렸어. 가난한 사람들은 집 안에 변변한 조리 시설과 주방용 도구도 갖추기 힘들었지. 한끼 해결이 절박한 그들은(항구 도시인 만큼 대다수가 선원이었단다) 노점상을 주축으로 다시 피타를 소환했어. 그 뒤 빵 위에 값싼 마늘과 소금, 돼지기름 조각 등을 올린 피타는 이제 ‘피자’로 불리게 됐지. 시간이 흐를수록 내 위에 올라가는 토핑은 다양해졌어. 그러다 1734년 운명의 어느 날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짝꿍들! 토마토, 치즈와의 만남이 이뤄졌단다.
두 친구 중 토마토가 먼저 날 찾아왔어. 사실 토마토는 아픔이 있는 친구야. 16세기 남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한 스페인은 토마토를 들여와 유럽에 소개했지. 그런데 유럽인들은 이 친구의 진면목을 몰라 보고 ‘악마의 열매’라 부르며 상처를 줬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토마토를 노점상 주인들이 들여와 내 위에 토핑으로 사용하며 ‘선원의 피자’라는 뜻의 ‘마리나라’라 이름 지었어. 그 뒤 치즈까지 합세해 우리의 시너지 효과는 빛을 발하게 되지.

1889년은 내게 잊을 수 없는 해야. 내가 빈민 음식에서 국민 음식으로 변화를 맞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 그때 일어났거든. 19세기 중반, 움베르토 왕이 주축이 된 사부아 왕가는 오랫동안 분열돼 있던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해 이탈리아 왕국을 세웠지.

당시 스페인의 부르봉 왕조가 다스리던 나폴리도 왕국의 새로운 영토로 편입됐어. 움베르토와 왕비 마르게리타는 나폴리를 방문해 둘러보고 요리도 맛보고 싶어 했지. 이때 유명한 피자 장인이였던 라파엘 에스포지토는 토마토와 모차렐라, 바질을 얹어 초록, 하양, 빨강의 이탈리아 국기를 상징하는 피자를 만들어 두 사람에게 바쳤단다.

한입 맛본 왕비는 가~암동했고 눈치 빠른 요리사는 이 새로운 피자를 왕비에게 헌정한다며 ‘마르게리타’라 했지. 놀랍게도 이 마르게리타를 만들어낸 피자집은 아직도 나폴리에서 영업 중이야. 가게명은 ‘브란디’. 시간 나면 아니 지구가 다시 안녕해지면 한 번 가봐~


왕비에게 헌정된 ‘마르게리타’.


선원의 피자 ‘마리나라’.


# 미국 찍고 세계 재패

19세기 말 미국은 선진공업국으로 급부상했어.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했지. 나폴리 출신의 이민자들도 공장이 몰려 있는 북동부 대도시 뉴욕과 뉴저지, 보스턴, 디트로이트, 시카고 등지에 정착했어. 1905년 나폴리인 제나로 롬바르디는 뉴욕 맨해튼에 미국 최초의 피자집 ‘룸바르디스’를 열었단다. 아직도 엄청 유명하다지?

처음 미국인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그저 노동자들의 값싼 음식 정도로 여겼지.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미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수많은 미군들이 나폴리에 주둔하는 사태가 벌어졌지.

나폴리에서 그들이 뭘 먹었겠니? 그래, 이제야 내 진정한 맛에 눈을 뜬 거야. 종전 후 고국에 돌아온 군인들을 중심으로 피자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고 지역마다 특색 있는 피자들이 개발되기 이르렀어. 뉴욕의 페퍼로니, 시카고의 딥디시, 뉴헤이븐의 화이트 클램 등. 또한 피자헛과 도미노라는 체인 피자점은 미국 전역에 피자맛을 전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지.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은 전 세계 GDP의 40%를 차지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어마무시했어. 난 미국의 후광을 등에 업고 세계적인 음식으로 발돋움했지.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냐.

특정한 형태, 일관된 맛을 고집하지 않는 나의 포용력이 한몫했달까? 한국의 불고기, 캐나다의 파인애플(하와이안 피자는 하와이 것이 아니다), 스웨덴의 바나나, 영국의 초콜릿까지. 어떤 토핑을 올려도 심지어 어떤 도우 형태를 만들어도 나 피자가 되잖니.

열린 마음 열린 생각. 글로벌한 시대에 갖춰야 할 미덕을 일찌감치 깨달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너무 잘난 척하는 거 아니냐고? 태어나서 처음 자랑 좀 해봤다, 예쁘게 봐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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