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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호

DICTIONARY | 신동원 쌤의 입시 용어 해설

연재를 마치며 1 진학 지도 30년, 기억에 남는 제자

외유내강 제자. 정이 많고 친구들에게는 의리를 지키며 편하고 털털하게 대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책임을 완수하고 언행이 신중함. 끝까지 인내하며 면학에 힘씀.


✚ 2000년대 초반에 만난 조군. 수업 시간 내내 방실방실 웃으면서 가끔 질문도 하며 노트 필기도 잘하는 학생이었습니다. 특히 과학에 관심이 많아 필자가 가르치는 <지구과학>은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좀 어려운 예제를 내주고 풀어보라고 하면 적극적으로 문제 풀이에 도전하고, 변수가 많아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에서는 가슴을 치며 “이해는 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라며 한탄하는 모습이 참 귀엽게 보였습니다.

✚ 나중에 알고 보니 조군은 다른 선생님에게도 칭찬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예의가 바르고 선생님을 잘 따른다는 이유였습니다. 멀리 지나가다 선생님이 보이면 달려와서 인사하고 안부까지 묻는다고 했습니다. 특히 연세 있는 선생님들은 더욱 조군을 좋아하셨답니다. 수업 시간에 늘 맨 앞에 앉아서 선생님이 뭘 원하는지를 미리 알고 도와드리고, 특히 컴퓨터나 마이크 등을 잘 다뤄 나이 드신 선생님의 조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 2학년이 되어 조군은 우연히 우리 반에 배정되었습니다. 주요 과목 석차등급이 3~4등급으로, 학급 10여 등수의 성적이었습니다. 그중 영어·과학 성적은 2~3등급으로 다른 과목에 비해 좀 높았습니다. 중학교 때는 반에서 항상 1~2등을 했는데 고등학교에 오니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한계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머리나 노력으로 1~2등급 받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답니다. 머리 좋고 독하게 공부하는 애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머리는 죽어라 공부해도 3등급이랍니다.



조군 : 선생님! 혹시 지금부터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서울대에 갈 수 있을까요?
필자 : 수시는 내신 성적 때문에 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정시는 가능하다!
조군 : 수능과 모의고사가 모두 2등급인데도 정시에 합격할 수 있나요?
필자 : 운동을 굉장히 좋아하던데 체육교육과는 어떻게 생각하니?
조군 : 체육교육과요? 100m를 13초로 뛰는데 갈 수 있을까요?
필자 : 13초? 어림도 없어! 수능 80%+실기 20%로 선발한다. 수능이 1.5등급 수준이면 수능으로 실기를 뒤집을 수 있다. 수능으로 뒤집자! 실기도 지금부터 훈련하면 차차 좋아질 거야!
조군 :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생님들은 하루 종일 학생들 속에서 묻혀 삽니다.
지나다가 무의식적으로 던진 한마디 말이 학생에게는
삶의 목표가 되기도 하고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 어느 비오는 날 아침, 좀 일찍 출근하는데 어떤 청년이 빠른 속도로 빗속을 뛰어가다가 되돌아와 인사를 했습니다. 조군이었습니다. 아침마다 10km씩 뛴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비오는 날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전속력으로 뛰어 등교합니다. 언덕 위에 학교가 있습니다. “오르막길을 뛰어 오르는 것이 힘들지 않니?”라는 물음에 “몸을 만들기 딱 좋은 곳입니다!”라며 가파른 언덕조차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책가방은 아버지가 출근하면서 수위실에 갖다놓는다고 하였습니다. 조군은 제 말을 듣고 2학년 초반에 체육교육과로 진로를 확정했습니다.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힘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수능은 학교 공부로 준비하고 실기는 일주일에 한 번 체육관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 학급에서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친구들과 예습이나 복습을 하고, 방과 후에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문제를 풀기도 하며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수학 성적이 안 나온다며 학원도 다니고 인터넷 강의도 들었습니다. 시험이 끝나는 날 교무실로 내려와 실수를 해서, 시간이 모자라서, 문제가 어려워서, 머리가 나빠서 좋은 점수를 못 받았다며 한참 동안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는 자기가 서울대 체육교육과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긴 해도 체육과에 갈 만큼 잘하지는 못해 친구들이 비웃을 거라고요. 힘없이 교무실을 나갔습니다. 다음날 그는 어김없이 아침 길 10km를 뛰어 학교에 올랐습니다. 참으로 대견한 학생이었습니다.

✚ 아침에 뛰어서 등교하는 모습이 여러 선생님께 포착되고, 자연스럽게 다른 반 학생들에게도 알려졌습니다. 몸이 약하니 건강을 지키려 운동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10월 초에는 체육 행사가 많습니다. 강남구 마라톤 대회가 있는데 여러 선생님과 학생들도 참가합니다. 지역 학교 육상선수, 미8군 현역 군인 등 달리기 좀 한다는 사람들도 많이 참가합니다. 조군도 10km 달리기에 참가했습니다. 필자는 동료 선생님들과 뛰다 걷다 하면서 한 2km쯤 갔는데 선두는 이미 반환점을 돌아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조군이 선두 그룹에서 미군들과 함께 뛰고 있었습니다. 미군은 긴 다리로 육상 선수처럼 기계적으로 달리고, 우리 반 조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짧은 다리로 악착같이 뛰고 있었습니다. 박수를 치고 환호는 해주었지만 눈물이 났습니다. 불쌍해서!

✚ 그는 고3이 되어서도 아침마다 달렸습니다. 수능 시험 일주일 전, 늦가을 비가 많이 내렸는데도 우비도 없이 달렸다고 했습니다.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합격한 후, 어머님이 고맙다며 학교에 찾아오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고마울 뿐이었습니다. 그는 서울대를 다닐 때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후에도 항상 선두에서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짠합니다. 그게 선생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글 한국진로진학정보원
신동원 이사

교단에 선 37년 동안 학부모들의 의견을 일일이 듣고 소통하려 노력했다. 서울 휘문고 진학교감, 서울중등진학지도연구회 회장을 거쳐 휘문고 교장을 역임했다. 현재 (사)한국진로진학정보원 이사로, 진학 지도 현장에서 얻은 노하우를 전국 진학 교사와 학부모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글도 쓰고 강연도 한다.



‘신동원 쌤의 입시 용어 해설’은 다음 호인 982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이번 호를 포함해 남은 두 번의 칼럼은 진학 지도 30년 동안 가장 인상적이었던 제자와 학부모에 대한 에피소드를 담습니다. _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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