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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호

내일신문-한국해양재단 공동기획 ‘2019 해양유적지 및 상해임시정부답사’

역사의 길 위에서 임정이 묻고, 장보고가 답하다

초·중·고 교사 100여 명이 중심이 된 6박 7일간의 중국 답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올해는 특별히 상하이에서 시작됐다. 100년을 버텨온 자랑스러운 우리의 유산이지만 타국의 것인 임시정부를 둘러보며 일행 모두 침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장보고를 만나러 갔다.

1천200년 전 한·중·일을 잇는 동북아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신라를 국제 무역의 교두보로 세운 걸출한 인물이자 바다를 장악하는 것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알았던 선각자. 서러웠던 역사와 당당했던 역사가 일주일간의 여정 속에 펼쳐졌다. 취재·사진 김한나 리포터 ybbnni@naeil.com


DAY 1.

상하이의 화려함 속에 숨은 아픈 역사를 마주하다

1일차 상하이 도착 - 목은당 참관(외관) - 와이탄

오후 2시 출발 예정이었던 상하이발 비행기가 1시간 넘게 연착됐다. 설상가상으로 상하이 공항은 입국하는 각국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00여 명의 방문단이 집결하기까지 시간이 걸려 결국 첫날 계획한 목은당(沐恩堂 : 상하이 황푸취에 있는 기독교 건물) 방문은 어렵게 됐다.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바라며 먼 이국땅 상하이로 건너와 투쟁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고단하고 외로웠다. 목은당은 그러한 이들의 쉼터였으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안식처였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켜온 곳으로 매주 일요일 여전히 예배를 진행하고 있으나 평일에는 문을 굳게 닫고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한다. 아쉽지만 버스에서 스쳐 지나가며 붉은 벽돌로 이뤄진 외관이나마 눈에 담았다.

어둠이 깔린 저녁, 황푸강 와이탄의 화려한 야경을 만났다. 한때 프랑스의 조계지(조약에 의해 한 나라가 그 영토의 일부를 한정해 외국인의 거주와 영업을 허가한 땅)로 설움을 겪었던 역사가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는 와이탄. 아팠던 과거와 경제도시로 우뚝 선 현재를 모두 아우르며 아경이 빛났다.


1·2 상하이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의 과거. 3 수북한 꽃으로 감사함을 표현한 마음들. 4·5 한글 이름마다 헌화된 꽃들이 눈물겹다.


DAY 2.

임시정부와 윤봉길 그리고 타국에 잠든 영웅들

2일 차 임시정부 참관 - 루쉰공원 매헌정 - 만국공묘(송칭링 능원) - 칭다오 이동

아침 기온 38°C. 선선한 편이라는 가이드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린다. 곧이어 도착한 임시정부 청사. 상하이 최고 번화가인 신천지(新天地)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는 일대가 새로이 단장할 때 용케도 재개발을 피했다.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요청으로 문화재로 지정된 것. 그럼에도 청사는 엄연히 중국의 소유이며 언제든 개발이 가능하다. 그 위태로움은 청사를 둘러보는 내내 마음 한편을 무겁게 했다. 중국인 안내원이 설명하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듣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하다. 그 어색한 발음에서 김구·윤봉길·이봉창 등의 이름이 나올 때는 콧등이 시큰해졌다. 일행 중 누군가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보안요원의 성난 외침이 들린다. “비에파이자오(別拍照)!” 사진 찍지 말라는 뜻이다. 2015년 중국 정부는 청사를 대대적으로 자체 리모델링했다. 그 뒤 관람객들에게 일체 사진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의 임시정부는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네요.” 모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친다는 교사의 말에 답했다. “아닙니다. 과거의 아픔이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배워야 슬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죠.”

임시정부를 나와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루쉰공원에 청년 윤봉길을 만나러 갔다. 1932년 4월, 당시에는 홍커우공원이라 불린 이곳에서 일본 천황 탄생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 가슴에 불을 품은 스물다섯의 청년은 삼엄한 경계를 뚫고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 일본 주요 인사들이 그 자리에서 숨지거나 중상을 입었다. 윤 의사의 거사 성공 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매서운 눈을 피해 떠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청년 윤봉길의 의거는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대내외에 알렸으며 당시 중국을 이끌던 장제스의 가슴을 울렸다. ‘중국 100만 대군과 4억의 중국인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고 극찬하며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한 것. 총칭에 임시정부가 다시 자리를 잡고 광복군을 키워낸 것은 윤 의사의 희생 위에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매헌정의 윤봉길 흉상 앞에는 꽃다발이 수북했다. 대한민국 독립기념관 측에 따르면 지금의 흉상은 실제 윤 의사의 생김새와 많이 달라 중국 측에 교체하고 싶다고 요청한 상태라 한다. 답은 아직 없다고.

임시정부 청사와 윤봉길을 담고 만국공묘로 향했다. 만국공묘는 1910~1930년대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신규식·박은식·노백린·김태연 등 14명의 독립운동가와 각국 사람들이 안장돼 있는 묘지다. 수많은 묘 중에 어떻게 그분들을 찾을까 걱정했으나 기우였다. 한글로 쓰인 묘지마다 헌화가 돼 있었다. 중국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늘 그 자리들은 쉼없이 꽃이 놓인다 했다. 치우기는 번거롭지만 한국인의 정성에 감동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독립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타국에 묻혀 계시지만 그럼에도 덜 서러우실 것 같아 꽃을 놓는 이들에게 마음으로나마 감사함을 전했다.


DAY 3-4.

미천한 신분을 뛰어넘어 국제적 명성을 얻은 거인 장보고

3~4일차 교주만 고려정관 답사 - 한·중 해양과학 공동연구센터 - 옌타이 이동 - 해양실크로드박물관 - 봉래각 - 등주수성 - 웨이하이 이동 - 유공도 - 영성 이동

상하이에서 열차로 7시간을 이동해 산동성 칭다오에 도착했다. 칭다오를 비롯한 산동성 일대에는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한·중 교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고려정관(고려 상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 있었던 칭다오 교주 판교진 해상공원으로 향했다. 1992년 한·중 수교를 기점으로 2000년에 한·중 학자들이 공동으로 주관해 판교진에 고려정관 유적지를 발굴하고 기념비를 세웠으나, 이곳이 계획도시로 지정되어 지금은 애석하게도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이어 방문한 ‘한·중 해양과학 공동연구센터’에서 해양 분야와 관련한 교류와 협력, 해양자원의 개발과 보전 작업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한·중 양국이 보다 나은 미래를 함께 도모해가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위안이 됐다. 다음날은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이동해야 했다. 슬슬 거인 장보고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국대 장일규 교수는 “장보고는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당나라 무령군 소장(小將), 재당 신라인들을 다스렸던 구당신라소의 관리를 거쳐 귀국 후 지금의 완도 지역에 청해진을 설치, 대사로 임명됐다. 흥덕왕으로부터 1만 명의 군사를 받아 역내 해적을 소탕하고 안전한 동북아 무역 항로를 구축했다. 또한 신분과 국경을 초월해 평등과 박애라는 보편적 이상을 꿈꾼 국제인이었다”고 설명했다. 교사들은 “초·중·고 <역 사> 교과서에는 그의 삶이 고작 두세 줄로 설명돼 있다. 중·일 양국도 불세출의 해상 영웅으로 기록한 인물을 왜 우리는 이렇게 홀대하는지 아쉬울 따름”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장보고 시대, 당과 신라의 교역과 전쟁의 중심지였던 봉래 등주항을 거쳐 백제·신라·고려 교역품과 침몰한 고려 선박을 복원·전시한 해상실크로드박물관을 둘러봤다. 박물관 내에 전시된 신라인은 조선시대 갓을 쓰고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고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모습을 보니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오후에는 웨이하이로 넘어가 15분가량 배를 타고 중국 내 애국 교육의 현장인 유공도(劉公島)로 향했다. 유공도는 청·일전쟁 중 일본의 연합함대와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맞섰던 황해해전의 최후 격전지다. 중국은 우리에게는 청·일전쟁으로 알려진 갑오전쟁의 패배를 기억하고 역사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유공도에 ‘갑오전쟁박물관’을 세웠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려던 조선 조정의 청군 개입 요청은 일 본의 한반도 침략 동기가 됐다. 이는 청·일전쟁으로 이어졌고, 전쟁에서 패한 청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더불어 대만까지 일본에 내어주고 쇠퇴의 길을 걸었다. 전쟁의 참담한 실패로 중국은 ‘천하의 중심 국가’에서 ‘아시아의 병자’로 전락했다’는 글귀가 눈에 띈다. 당당히 부끄럽고 아픈 역사를 드러내는 힘. 중국의 저력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1 고려정관 해상공원에서 강의를 듣는 교사들. 2 신라관 인물상의 갓과 좌식상은 조선시대 문화다. 3·4 침략자들에 의해 뜯겨지는 용(중국).

DAY 5-6.
여정의 마무리, 장보고에게 길을 묻다
5~6일 차 성산두 - 북여동해 - 진시황묘(사당) - 적산법화원 장보고 기념관 - 해초방 마을 - 석도항 도착 - 승선
다섯째 날,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기 위해 동쪽으로 나아가다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멈춰 서서 아쉬워했다는 성산두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뒤이어 중국의 민간신앙인 도교의 성지라 불리는 ‘복여동해’를 방문해 팔신선(八神仙)을 만났고 ‘진시황묘(사당)’에서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시황제의 위용을 느꼈다.
장보고의 숨결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적산법화원’으로 이번 여정의 대미를 장식했다. 장보고는 자신의 세력이 미치는 곳곳에 사찰을 세워 타지에 살며 고향을 그리워한 신라인들의 정신적 안식처로 삼게 했다. 장 교수는 “사찰은 신라인들을 위해 세웠지만 장보고는 일본인, 중국인, 심지어 페르시아인들에게도 사찰을 개방해 그들을 품었다. 1천200년 전 그는 ‘톨레랑스(관용)’를 실천한 국제적으로 존경받던 인물이었다”라고 장보고를 평가했다. 법화원에서 장보고 유적을 둘러보며 그 위풍당당한 동상 앞에 섰다. 그리고 물었다.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바다의 관점으로 보라. 바다는 열려 있기에 모든 것을 품는다.’
그의 말이 들려오는 것같다. 자주적인 군사력과 신분과 국적에 상관없이 사람을 소중히 대하는 톨레랑스의 정신으로 동북아 해상의 평화와 번영을 이룩한 장보고. 나라마다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경제 강국을 부르짖는 현 시점에서 그의 혜안을 되돌아본다.

장보고 선상 세미나
장보고와 수업을 논하다

“해양 분야는 우리 아이들에게 미지의 세계다. 장보고는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도 해상 경영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경제 발전과 관련해 앞으로 해양자원 개발과 환경 문제는 더 중요해질 것이다. 무궁무진한 기회의 장이니만큼 제 2, 제3의 장보고가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면 좋겠다.” _ 충남 광석중 길영순 교사

“이처럼 위대한 인물을 아이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게 아쉽다. 학교 현장에서 ‘장보고의 날’이나 주간을 정해 인물탐구를 해보면 좋겠다. 장보고가 등장한 역사서 원전도 찾아보고, 또 엄격한 신분제가 존재했던 시절 해상왕으로서 세계시민의 마인드를 품었던 그가 되어 일기를 써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아이들에게 장보고를 한층 가깝게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_ 대구 조일고 주배운 교사

“중학교에서 해양 분야는 수업 내용이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보고의 해상 경로를 통해 당시 해류와 바람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왜 산동성으로 해상 세력이 모아졌는지 등을 함께 고민하고 연구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흥미로울 듯하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과목과 연계해 장보고를 깊이 있게 알아봐도 좋겠다.” _ 경남 태봉고 한정규 교사

“해양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해양이 우리 아이들에게 일상어가 되려면 해양 관련 전문가의 강의나 알림 프로그램이 절실하다. 바다가 생활이며 미래임을 역사와 장보고는 알려줬다. ‘바다의 날’을 적극 홍보하고, 중·고등학교에서 바다 관련 동아리를 운영하고 지원해준다면 아이들에게 바다는 익숙한 하나의 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_ 광주 빛고을고 정화희 교사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그룹 토의를 진행하는 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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