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인증
구독자명
독자번호
* 독자번호는 매주 받아보시는 내일교육 겉봉투 독자명 앞에 적힌 숫자 6자리입니다.
* 독자번호 문의는 02-3296-4142으로 연락 바랍니다.
플러스폰 이벤트 참여
자녀성함
* 플러스폰 개통 시 가입할 자녀의 성함을 적어주세요(필수)
* 개통 시 자녀의 이름으로 가입하셔야 합니다(자녀 본인이 직접 가입 또는 학부모가 대리 가입 가능)
초·중·고 교사 100여 명이 중심이 된 6박 7일간의 중국 답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올해는 특별히 상하이에서 시작됐다. 100년을 버텨온 자랑스러운 우리의 유산이지만 타국의 것인 임시정부를 둘러보며 일행 모두 침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장보고를 만나러 갔다.
1천200년 전 한·중·일을 잇는 동북아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신라를 국제 무역의 교두보로 세운 걸출한 인물이자 바다를 장악하는 것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알았던 선각자. 서러웠던 역사와 당당했던 역사가 일주일간의 여정 속에 펼쳐졌다. 취재·사진 김한나 리포터 ybbnni@naeil.com
DAY 1.
상하이의 화려함 속에 숨은 아픈 역사를 마주하다
1일차 상하이 도착 - 목은당 참관(외관) - 와이탄
오후 2시 출발 예정이었던 상하이발 비행기가 1시간 넘게 연착됐다. 설상가상으로 상하이 공항은 입국하는 각국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00여 명의 방문단이 집결하기까지 시간이 걸려 결국 첫날 계획한 목은당(沐恩堂 : 상하이 황푸취에 있는 기독교 건물) 방문은 어렵게 됐다.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바라며 먼 이국땅 상하이로 건너와 투쟁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고단하고 외로웠다. 목은당은 그러한 이들의 쉼터였으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안식처였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켜온 곳으로 매주 일요일 여전히 예배를 진행하고 있으나 평일에는 문을 굳게 닫고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한다. 아쉽지만 버스에서 스쳐 지나가며 붉은 벽돌로 이뤄진 외관이나마 눈에 담았다.
어둠이 깔린 저녁, 황푸강 와이탄의 화려한 야경을 만났다. 한때 프랑스의 조계지(조약에 의해 한 나라가 그 영토의 일부를 한정해 외국인의 거주와 영업을 허가한 땅)로 설움을 겪었던 역사가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는 와이탄. 아팠던 과거와 경제도시로 우뚝 선 현재를 모두 아우르며 아경이 빛났다.
1·2 상하이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의 과거. 3 수북한 꽃으로 감사함을 표현한 마음들. 4·5 한글 이름마다 헌화된 꽃들이 눈물겹다.
DAY 2.
임시정부와 윤봉길 그리고 타국에 잠든 영웅들
2일 차 임시정부 참관 - 루쉰공원 매헌정 - 만국공묘(송칭링 능원) - 칭다오 이동
아침 기온 38°C. 선선한 편이라는 가이드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린다. 곧이어 도착한 임시정부 청사. 상하이 최고 번화가인 신천지(新天地)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는 일대가 새로이 단장할 때 용케도 재개발을 피했다. 대한민국 정부의 강력한 요청으로 문화재로 지정된 것. 그럼에도 청사는 엄연히 중국의 소유이며 언제든 개발이 가능하다. 그 위태로움은 청사를 둘러보는 내내 마음 한편을 무겁게 했다. 중국인 안내원이 설명하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듣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하다. 그 어색한 발음에서 김구·윤봉길·이봉창 등의 이름이 나올 때는 콧등이 시큰해졌다. 일행 중 누군가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보안요원의 성난 외침이 들린다. “비에파이자오(別拍照)!” 사진 찍지 말라는 뜻이다. 2015년 중국 정부는 청사를 대대적으로 자체 리모델링했다. 그 뒤 관람객들에게 일체 사진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의 임시정부는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네요.” 모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친다는 교사의 말에 답했다. “아닙니다. 과거의 아픔이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배워야 슬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죠.”
임시정부를 나와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루쉰공원에 청년 윤봉길을 만나러 갔다. 1932년 4월, 당시에는 홍커우공원이라 불린 이곳에서 일본 천황 탄생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 가슴에 불을 품은 스물다섯의 청년은 삼엄한 경계를 뚫고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 일본 주요 인사들이 그 자리에서 숨지거나 중상을 입었다. 윤 의사의 거사 성공 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매서운 눈을 피해 떠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청년 윤봉길의 의거는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대내외에 알렸으며 당시 중국을 이끌던 장제스의 가슴을 울렸다. ‘중국 100만 대군과 4억의 중국인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고 극찬하며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한 것. 총칭에 임시정부가 다시 자리를 잡고 광복군을 키워낸 것은 윤 의사의 희생 위에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매헌정의 윤봉길 흉상 앞에는 꽃다발이 수북했다. 대한민국 독립기념관 측에 따르면 지금의 흉상은 실제 윤 의사의 생김새와 많이 달라 중국 측에 교체하고 싶다고 요청한 상태라 한다. 답은 아직 없다고.
임시정부 청사와 윤봉길을 담고 만국공묘로 향했다. 만국공묘는 1910~1930년대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신규식·박은식·노백린·김태연 등 14명의 독립운동가와 각국 사람들이 안장돼 있는 묘지다. 수많은 묘 중에 어떻게 그분들을 찾을까 걱정했으나 기우였다. 한글로 쓰인 묘지마다 헌화가 돼 있었다. 중국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늘 그 자리들은 쉼없이 꽃이 놓인다 했다. 치우기는 번거롭지만 한국인의 정성에 감동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독립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타국에 묻혀 계시지만 그럼에도 덜 서러우실 것 같아 꽃을 놓는 이들에게 마음으로나마 감사함을 전했다.
DAY 3-4.
미천한 신분을 뛰어넘어 국제적 명성을 얻은 거인 장보고
3~4일차 교주만 고려정관 답사 - 한·중 해양과학 공동연구센터 - 옌타이 이동 - 해양실크로드박물관 - 봉래각 - 등주수성 - 웨이하이 이동 - 유공도 - 영성 이동
댓글 0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