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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칼럼

1139호

국외 독립운동사 기록하는 사진작가 김동우

중요한 건 꺾이지 않고 역사를 기록하는 마음

사진작가 김동우에게 ‘적당히’란 없다. 그의 삶은 오로지 독립운동 사적지를 기록하는 데 맞춰져 있다. 모든 비용은 스스로 부담하거나 후원으로 채우는 것도 모자라 집도, 오토바이도 팔았다. 그렇게 떠난 길 위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들의 후손을 만날 때면 매번 눈물을 쏟고 만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뜨겁게 만드는 걸까.

취재 김한나 ybbnni@naeil.com
사진 배지은


김동우 작가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신문사 기자로 일했다. 2017년부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아 사진과 글로 기록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근현대사기념관 등 전국 각지에서 전시를 열었으며 지은 책으로는 <뭉우리돌의 바다> <뭉우리돌의 들녘> <몽우리돌을 찾아서> 등이 있다.




Q. 독립운동 사적지와 후손을 찾아 기록하는 일을 ‘개인적’으로 하고 있다.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뭔가?

나만의 주제로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잡히지 않았다. 직장을 다니다가 두 번째 세계 여행을 떠났다. 내가 방랑벽이 좀 있다.(웃음) 온전히 사진을 위한 여행이었다. 운명이었을까, 첫 목적지인 인도 델리에서 답을 찾았다.

델리에는 인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붉은 사암으로 만든 ‘레드 포트’라는 성이 있다. 도착해 성에 관한 정보를 찾다 우연히 이곳이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가 활동했던 요충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충격으로 잠시 ‘멘붕’에 빠졌다.

학창 시절부터 나름 ‘역사를 좀 안다’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들의 존재는 몰랐다. 배운 기억이 없었다. 카스트 제도와 힌두교, 카레, 요가의 나라 인도가 즉시 대한민국 독립군 활동지로 변모됐다.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더 조사해보니 독립군의 활동지는 전 세계에 분포돼 있지만 관련 기록이 너무나 빈약했다. 두 번째 충격이었다. 한편으론 기뻤다. ‘이게 내가 할 일이구나, 내 운명이구나!’ 싶어서.


*인면전구 ‘인면’은 인도와 버마를 뜻하고 ‘전구’는 전투지역을 의미한다.


Q. 우리의 독립군이 인도에서 활동했다니 뜻밖이다.

임시정부(임정)가 광복군을 그 먼 땅까지 보낸 이유는 2차 세계대전 참전국 지위를 얻기 위해서였다. 연합군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고 이를 인정받으면 전쟁 후 강대국에게 우리의 자주 독립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으리라 내다 본 것이다. 임정은 혼란스런 국제 정세 속에서 독립에 필요한 일이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인면전구공작대는 이런 노력의 산물인 거다. 최근엔 이 내용이 <한국사> 교과서에 짧게나마 실렸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Q. 일을 시작하며 ‘커다란 희생’을 치렀다고 들었는데?

집을 팔았다.(웃음) 시작할 땐 젊었으니까 금방 재기할 수 있으리라는 무모한 자신감이 있었다. 내 집이 없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건 국외에 방치돼 있는 우리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볼 때다. 송구하고 면목 없다.

이제와 고백하건대 일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왜 아무도 이 작업을 하지 않았는지 깨닫게 됐다. 개인이 책임지기엔 규모가 너무 큰 ‘무모한 도전’이었다. 시간과 자본이 무한정 들어가는 데다 관련 정보도 조각조각 나 있다. 지금까지 10개국을 방문했는데 지역마다 언어도 달라 작업 하나를 완수하는 것 자체가 기적일 정도였다. 보통 사진작가는 좋은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 같은 장소를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하지만 이건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발을 빼기엔 이미 너무 깊이 담근 것 같다.


Q.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를 소개한다면?

모두 다 소중해 어느 한 지역만 특정해 소개할 수 없다. 그래서 인터뷰 기회가 올 때마다 새로운 장소를 소개하려고 한다. 멕시코 살리나크루스 해변은 1905년 ‘멕시코 한인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곳이다. 러·일 전쟁으로 직격탄을 맞은 대한제국 백성 1천여 명은 굶주림에 시달리다 멕시코 이민 길에 올랐고 40일 만에 살리나크루스에 도착해 ‘애니깽(용설란)’ 농장으로 팔려가게 된다. 노예나 다름없는 삶이었지만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은 이들에게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진다. 당시 멕시코의 많은 한인은 조국을 원망하는 대신 ‘숭무학교’를 세워 청년을 독립투사로 길러냈다. 죽지 않을 정도의 월급만 받던 사람들이 돈을 아껴서 말이다. 그건 어떤 마음이었을까. 애니깽 농장일은 매일 새벽 5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오전 5시에 맞춰 여명이 밝아오는 애니깽 농장을 촬영했다. 사진을 꼭 보길 권한다.


Q. 일본산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처음 사진을 배울 때 독일산 수동 카메라 ‘라이카’로 시작했다. 이 또한 운명이지 싶다. 내가 찾아가는 곳 중 가장 비중이 큰 장소가 순국선열의 무덤이다. 평생을 독립운동하느라 고초를 겪으신 분 묘소에 일본산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모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신을 지키느라 고생 중이지만 후회는 없다.


Q. 최근 출판한 책 <뭉우리돌의 들녘> 뜻은?

‘뭉우리돌’은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 둥글둥글하고 넓적한 큰 돌을 뜻하는 순우리말로 <백범일지>에 나온다. 김구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초 받을 때 일본 순사가 ‘지주가 밭을 갈려면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대한독립을 외치는 무리를 솎아내겠다고 하자 ‘오냐, 내가 네놈들 앞에 평생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살겠노라’고 답한 부분에서 따왔다. 전 세계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한 우리네 선조는 모두가 뭉우리돌이었으니까.


Q. 현재 일본은 한국인의 ‘최애’ 여행지로 부상했다. 정부 정책도 강제징용, 위안부, 독도 문제 등에 비판보단 관대한 입장을 내놓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나라는 형체고 역사는 정신’이라고 했다. 정신이 사라지지 않는 한 형체는 언제든 되찾을 수 있단 의미다. 유대인의 역사를 떠올려보면 금방 이해가 갈 거다. 멕시코 외에 미국, 하와이, 중국 등 우리 선조는 세계 어딜 가나 단 한 군데도 예외 없이 학교를 세웠다. 민족의 얼이 담긴 국어와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말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노력의 결과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일본 여행? 적극 추천한다. 수학여행도 기왕 외국으로 갈 계획이 있다면 일본으로 가라 권하고 싶다. 맛집도 가고 쇼핑도 하라. 그러다 잠시만 짬을 내 강제 징용으로 고향 땅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어간 이들의 무덤에 참배해보고, 오사카성 내부에 전시된 임진왜란 재현 현장도 둘러보라. 역사가 재미없는 이유는 현장에서 배워야 할 걸 교실에서 글로만 익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는 우리에게 치욕의 역사다. 이걸 잊으면 많은 독립운동가가 목숨 걸고 지키려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거다. 일본은 이웃 나라다. 당연히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인 우호관계를 이어가야 한다. 하지만 건강한 우정은 과거를 잊지 않을 때 가능하다. 과거가 다시 미래가 돼선 곤란하지 않겠나. 확고한 역사의식이 필요치 않은 민족은 없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만날 기회가 많은데 그들 중 쉬운 인생을 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원망도 들 법한데 모두가 합심이나 한 듯 “독립운동은 할아버지, 아버지의 사명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자신을 고생길로 던져 넣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야길 들려주며 “잊지 않고 찾아와줘 고맙다”라고 말한다.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지 않나?


Q. 그렇다면 청소년의 역사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면 좋을까?

어릴 적엔 대부분 역사를 좋아한다. 이야기로 받아들이니까. 입시라는 벽에 부딪치면 역사는 머리 아픈 암기 과목이 돼버린다. 교과서와 문제집에 매몰된 역사는 매력을 잃는다. 역사 수업을 에세이와 접목하면 어떨까. 학생이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에서 주제를 선정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전개 과정, 결과를 정리해보도록 하는 거다. 지식을 소화해 직접 이야기로 풀어내는 행위는 들어서 안다고 여기는 것과 천양지차다. 역사 지식과 의식도 고양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문 실력까지 키울 수 있는 일거양득일 것 같다.

오늘날의 자유와 평등, 경제적 풍요는 그냥 오지 않았다. 철저하게 황망했고 치욕적인 과정을 겪어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많은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억은 한번 끊어지면 절대로 회복할 수 없다. 무리하게 복구를 시도하면 미화되거나 왜곡된다.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한다는 건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노력이라는 점을 이 땅의 많은 청소년이 가슴 깊이 느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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