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한종 교수
춘천교대 교육학과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후 2007년 일본 와세다대에서 인간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청소년상담원(현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상담팀장을 거쳐 2009년부터 춘천교대에 재직하고 있다.
춘천교대에서 입학처장, 산학협력단장, 대외협력처장을 역임했고, 한국초등상담교육학회장,
한국상담학회 학술지 편집위원 등을 지냈다.
학교 현장에서 교사가 직접 수행하는 심리상담, 경직된 신념을 변화시킴으로써 심리적 문제를 해소하는
합리적 정서행동치료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꽤 ‘우울’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만 6~17세 아동·청소년의 우울증 진료 인원은 3만7천386명으로 지난 2018년의 2만3천347명 대비 60%나 늘었다. 도대체 무엇이 우울한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여기 오랜 친구인 갑수, 을룡, 병철이 있다. 함께 등산하던 세 친구는 깊은 산속에서 사나운 멧돼지와 눈이 마주쳤다. 거리는 불과 10m 남짓이다. 이 위험한 상황에서 갑수는 감히 짐승이 사람을 놀라게 한다고 화를 내며 멧돼지와 싸울 기세다. 을룡은 너무 무섭다며 당장 도망가려고 한다. 병철은 이도 저도 다 소용없다며 바로 옆 바위 뒤에 숨어 미동도 하지 않는다. 누구의 생존 확률이 가장 높을까?
우울의 순기능과 역기능
정답은 병철이다. 갑수처럼 막대기를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싸우려다가는 도리어 멧돼지에 물려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을룡처럼 허겁지겁 도망가는 것도 위험하다. 멧돼지가 흥분해서 사람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병철처럼 바위나 나무 뒤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생존 확률을 높인다. 멧돼지는 시력이 몹시 나쁜 데다 자극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머지않아 깊은 숲속으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적 감정은 위기 상황에서 생존 확률을 높이는 행동을 취하도록 자극하는 도구이며, 진화의 과정에서 발달한 건강한 기능이다. 갑수의 분노는 두려움 없이 위험과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을룡의 두려움은 위험으로부터 신속히 도주해야 하는 상황에서 필요한 감정이다. 혹시 싸울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최악의 위기 상황이라면 무엇을 해야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질까?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서 위협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 병철이 느낀 우울은 행동 의욕을 떨어뜨려 신체 움직임을 최소화함으로써 생존할 기회를 노릴 수 있게 도와준다.
수시로 생명의 위협과 마주하는 원시인에게는 부정적 감정이 매우 유용하겠지만, 훨씬 안전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현대인에게는 역기능이 두드러지기 쉽다. 부정적 감정의 강도, 빈도, 지속 시간이 문제 해결에 요구되는 것보다 과하거나,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은 상황(달리 말하면, 부정적 감정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부정적 감정을 느낄 때, 그것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해로운 감정으로 모습을 바꾸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우울한 감정은 그 자체로도 고통스럽지만, 인간의 인지·행동·신체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우울한 상태에서는 비관적 생각이 증폭되고 주의집중이 곤란해지며 기억력이 저하되는 등의 인지적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행동적 측면에서는 의욕이 떨어져서 해야 할 일을 미루는 일이 반복되고 사람들과의 접촉을 회피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게다가 우울한 사람 중 상당수는 불면증, 피로감, 면역력 저하 등의 신체적 증상을 경험한다.
우울을 일으키는 신념과 인지삼제
인간은 생존과 행복에 필요한 절대적 조건들에 대한 개인적 신념을 갖고 있다. 이 신념이 좌절될 때, 마치 홀로 사나운 멧돼지와 마주친 것과 같은 절박한 위기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나타난다. 개인적 신념은 자신, 타인, 세상이 반드시 어떠해야만 한다는 식의 절대적 요구의 형태를 띤다. 예를 들면, ‘나는 반드시 좋은 대학에 가야만 한다’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친절해야만 한다’ ‘세상일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만 한다’와 같은 생각이다.
어떤 사람은 높은 성취를 이뤄내야만 한다는 신념이 강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좌절된 상황을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인다. 이와 반대로 어떤 사람은 성취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지만, 자신이 ‘사랑받아야만 한다’는 신념이 강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신호를 포착했을 때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다.
자신의 신념이 좌절된 상황을 싸울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극도의 절박한 위기로 인식할 경우, 우울 상태로 전환해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것은 생존 확률을 높이는 하나의 전략이 된다. 이 전략을 선택한 사람들이 자신을 우울하게 만들기 위해 수시로 머리에 떠올리는 세 가지 부정적 생각을 ‘인지삼제(cognitive triad)’라고 부른다. 자신, 세상, 미래에 대한 극단적 결론이며, 상황을 실제보다 더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보며 자신을 우울감에 빠뜨리는 생각이다.
인지삼제의 첫 번째 요소는 ‘나는 열등하다’ ‘나는 무가치한 존재다’와 같이 자신을 깎아내리는 생각이다. 두 번째 요소는 ‘사람들은 매우 이기적이다’ ‘세상은 아주 험난한 곳이다’와 같이 주변 사람들과 환경을 자신의 생존과 행복을 방해하고 위협하는 장애물로 여기는 생각이다. 마지막 요소는 ‘뭘 해도 소용없을 거야’와 같은 미래에 대한 부정적 예측이다. 인지삼제는당면한 문제와 맞서거나 세상과 상호작용할 동기를 잃게 만들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행동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우울한 사람들은 그런대로 괜찮은 상황조차도 절박한 위기로 간주하고, 인지삼제의 극단적 결론에 끼워 맞춘 왜곡된 해석을 내리는 탓에 일어나지도 않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 결과, 불필요한 우울감을 만들어내며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놓치고 만다.
1110호부터 학교 안팎에서 고민이 큰 중요한 교육 이슈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교육학자 12명의 릴레이 칼럼이 이어집니다. 이화여대 정제영 교수를 시작으로 강지영(성신여대 교육학과 교수) 강태훈(성신여대 교육학과 교수) 김동호(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김준엽(홍익대 교육학과 교수) 박소영(숙명여대 교육학과 교수) 박주형(경인교대 교육학과 교수) 이상무(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이한종(춘천교대 교육학과 교수) 임효진(서울교대 초등교육과 교수) 조현명(이화여대 연구교수) 황지원(서울시립대 교육대학원 교수) 등 1990년대에 교육학과에 재학하면서 함께 공부한 3세대 대표 교육학자들의 깊이 있는 분석과 해법을 만나보세요._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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