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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칼럼

1085호

2023 공신들의 진(로쾌)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꼭 양자택일해야 해?



<① 우당탕탕 진로 탐색>
② 좌충우돌 고교 생활
③ 파란만장 대입 도전
④ 달콤씁쓸 대학 생활
⑤ 후배에게 보내는 응원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잘 구분해야 한다.”
내 청소년기를 무겁게 한 고민이었다. 외고 출신, 영문과 재학 중, 꽤 높은 수준의 공인어학성적 등 내 이력만 보면 ‘영어’를 특기이자 취미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오히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중 어디에 떳떳하게 영어를 내세울 수 있는지 스스로 의문을 품었다. 다른 좋아하는 것에 도전했다가 스스로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고, 외고에서는 장점이자 특기였던 영어 실력을 부각하기 어려워 방황하기도 했다. 고교 선택부터 대입까지, 거듭 고민하고 도전한 결과가 지금이다.


자연스럽게 익힌 영어

고백부터 해야겠다. 사실 영어는 내게 평범한 일상이었을 뿐이다. 아주 좋아한다거나 혹은 꼭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 대상이 아니었다. 언어를 중요하게 생각하신 부모님 덕분에 6살 위의 언니와 함께 언제나 영어에 노출되는 환경에서 지냈다. 한글 책만큼이나 영어 책이 많았고, TV에서도 영어권 아동·청소년 프로그램이 나왔다. 당시 개봉했던 유명한 애니메이션도 영어 더빙 버전으로 봤다. 한글 자막 부분을 종이로 가리고 시청했던 기억도 있다. 그렇다 보니 우리 집에서는 한국 가정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영어로 듣는 기묘한 장면이 종종 연출됐다. 국어·수학 학원은 중2가 되도록 다니지 않았지만, 전화 영어 수업은 유치원 때부터 시작했다. 덕분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영어를 ‘잘’ 터득했고,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됐다.

다만, 는 알았지만 <뽀로로>나 <방귀쟁이 뿡뿡이>는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영어로 간단한 문장은 쓸 수 있었지만, 한글 받아쓰기에서 0점을 맞았다. ‘좋아하는 것’에 지나치게 몰두한 부작용이 나타난 셈이다. 결국 학습지로 매주 한글 공부를 해야 했다. 다행히 흡수력이 빠른 어린아이 특유의 말랑말랑한 뇌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받아쓰기에서 만점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취향은 바뀌지 않았다. 계속 영어권 문화콘텐츠를 즐겼다. 중학생이 된 후에도 친구들이 좋아했던 아이돌 노래와 아프리카TV 스트리머보다 팝송과 영어권 유튜버에 마음을 뺏겼다. 학교에서도 영어는 큰 무기가 됐다. 영어 학습에 필요한 시간이 적어, 그만큼 다른 과목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꽤 우수한 성적을 보유한, ‘유망한’ 학생으로 평가받았다.


그림 향한 열망과 도전 그 끝에 찾은 해답 ‘콘텐츠’

그도 잠시, 다시 고비를 만났다. 원래 관심 있던 그림에 도전하면서, 영어는 그저 ‘잘하는 것’으로 밀려났다. 따로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해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다, 예술 계열 특성화고에서 주최하는 영재학급 모집에 지원, 합격했다.

합격 소식을 들은 부모님은 매우 혼란스러워하셨다. 미술 입시 학원에 다닌 학생들도 탈락하는 시험이기에 지원을 허락했는데, 합격증을 들고 왔으니 당황하실 만도 했다. 결국 매주 토요일마다 경기도 수원시에서 하남시까지, 경기 남부를 횡단하며 영재학급 등하교를 도와주셨다. 동시에 끈질기게 애니고 말고 특목고에 도전하라고 설득하셨다.

나 역시 고민이 컸다. 영재학급에서 원하는 길을 열었지만, 동시에 친구들과의 실력 차이를 눈으로 확인했다. 당시 20명이 모인 학급에서 미술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손도 느렸고, 드로잉 실력도 떨어졌다. 기초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부터 배웠지만 몇 년간 탄탄히 기본기를 쌓은 친구들과의 차이를 좁히긴 어려웠다.

1년간 마음껏 배우고 도전하며 행복했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미래도 따져보게 됐다. 그 시기, 나는 필사적으로 나만의 장점을 찾았는데 의외의 결론에 다다랐다. 그림보다 기획, 시나리오 구성에서 강점을 발견한 것이다. 영어를 통해 더 다양한 문화권, 폭넓은 분야의 콘텐츠를 접해왔기에 가능했다. 결국 더 디테일하고 독특하면서 설득력 있는 작품을 기획해낼 수 있는 능력을 장점으로 키워낸다면 그림 실력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친언니가 그해 외고를 졸업하고 대입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었기에 자극이 됐다.




모두가 영어 잘하는 외고, 내 생존법은 ‘마주하기’

결국 나는 특목고 입시를 준비해 합격했다. 하지만 미련이 남았던 것인지, 아니면 여태까지 ‘잘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던 영어 실력을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경험을 해서인지 입학 후 1년간 꽤 방황했다. 여러 방법으로 회피할 길을 찾기도 했다. “학교 자퇴하고 미술에 올인할래”부터 “유학 준비해서 해외대학에 가자”까지 여러 가지 도망칠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그도 1학년 2학기에 들어서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늘 그랬듯 일단 정면으로 부딪쳐보기로 결심했다. 그런 마음은 영어 공부를 향한 의지에 불을 붙였다. 결국 5등급에서 2등급까지 성적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는 심리적·학업적 안정과 ‘잘하는 것’을 되찾게 했다. 동시에 다시금 ‘지금 할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탐색하도록 이끌었다.

영화를 보면서 작성한 영문 보고서를 통해 교내 에세이 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직접 그린 발표 자료들을 활용해 수행평가에서 만점을 받았다. 대입을 중심으로 생활의 모든 것이 굴러갔기에 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지만, 다행히 다시 열정을 품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선 한 친구의 역할이 컸다. 외고에서 유일하게 자연 계열 진학을 결심한 친구였다. 입학 후 진로 변경을 결심한 그 친구는 2학년 때부터 모의고사마저 자연 계열로 따로 신청해 시험을 치렀다. 학교생활에서 누구보다 괴리감을 심하게 느꼈을 친구가 포기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모습에, 나름 나에게 유리한 시스템 안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좌절할 여유가 있는지 스스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는 모르겠지만 나의 혼란스러운 시기 동안 알게 모르게 이정표가 되어줬다.


진로 탐색엔 외면도, 포기도 없다!

고교 시절을 거치며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 ‘잘하는 것’을 외면할 필요가 없고, ‘잘하는 것’을 위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고교에서의 시간이 지나갔고 한 차례의 재도전 이후 현재 한국외대를 다니고 있다. 잘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바탕으로 가장 자신 있는 영어를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영미문학·문화학과를 선택했다. 또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학교 홍보대사에 지원해 그림을 그리면서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최근에는 미디어커뮤니케이션 이중 전공 이수 자격도 얻었다. 더욱 진지한 진로, ‘좋아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본격적인 토대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구분은 중요하다. 하지만 어느 한쪽을 쟁취하기 위해 다른 한쪽을 소홀히 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다. 나는 진로와 전공을 깨닫고 실행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고, 여러 번의 좌절과 아픔도 있었다. 그래도 스스로 깨달은 것을 포용하고 실천해나가며 나만의 길을 걷고 있다. 어찌 보면 간단한 결론이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후배들에게 내 글이 나보다 조금 더 빠르게, 더 쉽게, 덜 아프게 깨달아가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대학생 선배들의 생생한 조언으로 사랑받았던 공신 칼럼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달라진 환경에서의 진로 탐색과 학습입시 준비는 물론 대학 생활, 전공 이야기까지 진솔하고 생생하게 담을 예정입니다. 선배들에게 궁금한 점은 이메일로 문의해보세요._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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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채민
  • 2023 공신들의 진로쾌담 (2023년 03월 22일 10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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