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한 편의 시대극이 선사하는 매력과 울림은 크다. 특히 최근 종영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화제다. 조선 영·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 덕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이 대거 생겨났다는 후문이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 군주로 칭송받는 정조와 그의 우여곡절 많았던 삶, 그리고 정조가 30년 동안 ‘찐’으로 짝사랑(?)한 끝에 가족이 된 의빈성씨(성덕임)의 러브 스토리는 아무리 ‘역알못’이라도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평이다. 이번 방학, 드라마의 두 주인공과 함께 조선의 역사를 따라가보자. 그들의 발길이 닿은, 손때 묻은 유적지와 유물도 둘러보며 생동감을 느끼다 보면 어느새 역사왕이 돼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취재 김한나 리포터 ybbnni@naeil.com
사진 imbc연예·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
완벽주의자이자 소통의 왕, 정조
정조 이산은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이야. 고작 11살 때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어린 정조는 숨죽이며 살았지.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려 처절할 정도로 노력했고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정치색도 일절 드러내지 않은 채로. 게다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일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고 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대신들은 날로 커가는 정조가 두려웠어. ‘얘가 왕이 되면 연산군 같은 폭군이 되는거 아냐?’ 하면서 말야. (연산군도 처음에는 멀쩡(?)했다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고 폭군이 됐잖니.) 그래서 끊임없이 정조를 위협했지. 정조 역시 그를 잘 알고 있었어. 그래서 더더욱 공부에 몰두한 거야. 늘 암살의 위협을 느껴 첫 닭이 울기 전까지 밤새 책을 읽을 정도였다니 말 다했지. 게다가 무예도 뛰어나 화살 50발 중에 49발을 명중시킨 명사수였대! (1발은 겸손의 덕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안 맞췄대.)
정조는 위기를 기회로 삼을 줄 아는 똘똘이였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새벽까지 잠 못 이루지면서도 훌륭한 군주가 될 방법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거든. 그리고 왕이 된 그날 준엄하게 선포하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_ <정조실록> 1권, 즉위년 1776년 3월 10일
아버지가 당쟁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도한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어. 여러 당파의 인재를 골고루 공정하게 관리에 등용했지. 왕의 직속 군대인 ‘장용영’을 만들어 군사 기반도 다졌어. 학문 연구 기관인 ‘규장각’을 세워 자신을 보필할 똑똑하고 바른 신하들도 양성했지.
특히 규장각의 인재였던 정약용에게는 계획 도시인 ‘수원화성’의 설계를 맡겼어. 백성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읍성’과 전쟁에 대비한 ‘산성’을 모두 갖춘 성곽 도시를 만들어 상업과 군사의 중심지로 삼은 거야. 정조와 정약용의 합작품이자 근대 성곽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화성, 직접 가보면 더 생생하게 느껴질 걸?
로맨티시스트 정조의 사랑, 의빈성씨 덕임
덕임은 혜경궁 홍씨 집안 청지기의 딸이었어. 정조와는 한 살 터울로 둘은 함께 자라며 우정을 쌓지. 어릴 적부터 수학 성애자였던 정조는 덕임을 고문할 생각이었는지 어려운 수학 문제를 가르치곤 했어. 그런데 이것 봐라? 잘하네! 그러면서 덕임에 대한 애정이 커지기 시작했지. 무려 15년간이나. (수포자는 웁니다.)
왕이 된 정조는 덕임에게 프러포즈를 했어. 덕임은 당차게 거절했지. 당시 정조와 정략 결혼한 아내 효의왕후 사이에 자식이 없으니 그럴 순 없다면서 말야. 매너남 정조는 뜻을 존중해 잠시 물러났지만 이후 두 번의 프러포즈를 더했고 결국 30년 만에 부부의 연을 맺게 돼.
덕임은 의빈성씨라는 직함을 하사받았고 1782년 문효세자를 낳아 궁중의 사랑을 받았어. 하지만 4년 뒤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크게 상심해 6개월 뒤 눈을 감았단다. 아들과 아내를 잃고 너무나 슬펐던 정조는 여러 편의 글을 남겼어. ‘사랑하는 빈,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역대 임금 가운데 유일하게 빈의 묘지명에 직접 ‘사랑한다’는 친필을 남겼다지. 실제로 보면 더 절절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왕과 후궁의 관계를 넘어선 사랑하는 여인이자 조력자였음을 알 수 있어.)
실제로 실록에는 덕임이 죽고 난 뒤 며칠간 정조가 정사를 돌봤다는 기록이 없단다. 완벽주의자 정조가 얼마나 ‘맴찢’했는지 말 안 해도 알겠지? 이제 우리 ‘세기의 로맨스’ 주인공은 누구?, 하면 정조와 의빈성씨로 대답하기다!
1붕당정치와 당쟁1
‘붕당’은 정치적, 학문적으로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만든 무리를 뜻해. 조선 중기는 붕당들이 정치를 이끌어가게 돼. ‘당쟁’은 뜻이 다른 붕당 간의 다툼을 말하는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붕당 간의 싸움은 점점 치열해지지. 처음엔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던 붕당은 훗날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고, 서인도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게 된단다.
1의빈성씨와 문효세자가 잠든, 아니 잠들었던 ‘효창원’1
문효세자를 떠나보낸 정조는 아들의 안식처를 궁 가까운 곳에 두고 싶어 했어. 도성과 한강 사이에 위치한 소나무 숲이 우거진 양지바른 언덕(현 효창공원)을 발견하고 아들의 묫자리로 삼고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뜻의 ‘효창묘’라 했지. 덕임도 이곳에 묻혔고.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이곳은 철저하게 파괴돼. 처음엔 일본군 기지로 다음엔 골프장으로 그 뒤에는 정조네 가족을 강제 이장시키곤 일제는 자신들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각종 비석을 곳곳에 세웠지.
대미는 효창원의 공식 명칭을 ‘효창공원’으로 바꿔버린 거고. 시간이 흘러 지금 이곳은 독립유공자를 모신 묘역이 됐어. 여전히 제 이름을 찾지 못한 채 공원으로 불리며 말야. 그럼 문효세자랑 덕임이는 어디로 갔냐고? 경기 고양시 서삼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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