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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칼럼

886호

GLOBAL EDU 유학생 해외통신원

진로 막막하지만 철학과가 존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



철학이 아니었다면 프랑스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왜 철학 공부를 하니?’라는 질문은 ‘왜 프랑스로 갔니?’와 일맥상통한다. 내게 유학이란 그곳에서만 채울 수 있는, 갈증을 풀어줄 단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배우는 경직된 학문이 아니라, 인문학이 삶을 얼마나 찬란하게 만드는지 아는 나라인 프랑스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 내 이상은 과연 현실일까?


철학이 낯설지 않은 프랑스에서의 공부
프랑스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하는 한국 유학생을 찾기는 어렵다.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 철학 공부를 위해 프랑스 유학을 마음먹는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을지 모른다. 불어로 문장 하나 제대로 만들 줄 모를 때도 누군가 내게 프랑스에 온 이유를 물으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La philosophie(철학)!”이라고. 3년간 수없이 되풀이한 내 대답 앞에서 이곳 사람들의 반응은 매번 놀랍다. ‘그거 공부하면 철학관 열거냐’는 비아냥거림은 가당치도 않거니와, 정말 멋진 학문이라며 맞장구를 쳐주기 때문이다.
문과든 이과든 고등학교 졸업을 위해 철학 시험을 치러야 하는 나라답게, 누구나 대화를 풍성하게 하는 기본적인 철학 지식을 갖추고 있다. 프랑스인들이 철학을 대하는 시선과 친밀감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기 전부터 나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내 목표는 대학에서만 전달되는 딱딱한 철학적 지식이 아니라 일상 속에 스며든 태도, 즉 ‘철학적으로 생각하기’였기 때문이다.


수업 방식은 고전적이지만 질문에 질문을 더하는 철학 공부
프랑스의 철학과에서도 플라톤을 읽고 칸트를 배운다. 하지만 시험을 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적 글쓰기다. 수업 시간에 배운 철학자를 줄줄이 읊어도 그 전개 방식이 철학적이지 않다면 좋은 점수를 얻기 힘들다. 사실 프랑스 인문대학의 수업 방식은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토론형보다는 일방적인 강의가 대부분이고 글쓰기는 양식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하지만 이 융통성 없는 교육 방식에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자유가 있다.
‘역사에 의미란 있는가?’ ‘생명체와 기계는 비교 가능한가?’처럼 한 줄의 문장으로 주어지는 작문 과제다. 물론 정해진 답이 없는 시험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글쓰기 양식을 엄중히 지키면서도 추구하는 지적 자유란 무엇일까?
프랑스 철학 시험을 마주하며 느꼈던 어려움은 ‘주어진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철학적 과제는 오히려 ‘주어진 질문에 다시 묻기’에 가깝다. 질문한다는 행위는 의도한 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대답의 쌍은 절대로 철학적 과제가 아니다. 우리가 철학을 할 때는 질문이 아닌 문제점 혹은 모순이 주어졌을 때 해결책을 고민하는 순간이다.
프랑스의 글쓰기에서는 서두에서 먼저 질문의 문제점과 의도를 찾아내 새로운 물음을 완성하고 본론에서 해결책을 찾아나가야 한다. 따라서 단순히 철학적 지식을 배우는 것을 넘어 ‘사유하는 법’을 익힌다. 사실 우리가 배우는 철학자들도 동시대에 주어진 질문을 회의를 가지고 바라보았던 사람들이다. 스콜라 철학의 전통으로 모든 것을 신의 의도라고 둘러대던 시대에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통해 인간의 손에 사유를 들려준 철학자가 바로 데카르트였다. 그래서 철학과의 과제 중 하나인 텍스트 해석도 프랑스식 글쓰기의 맥락과 닮아 있다. 작문에서는 모순을 찾는 주체가 나라면, 철학자의 문장을 해석할 때는 글쓴이가 문제 삼고자 했던 지점을 찾아 그만의 사유를 따라가는 것이다.


진로 불투명하지만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 길러
사실 철학과에서 ‘전공을 살리는’ 길을 찾기는 힘들다. 하지만 교수님은 수업중에 “여러분 걱정 마세요. 오랜 시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다들 제 살길을 찾아나가는 것을 봤답니다.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법은 여러분의 진로선택에 도움이 될 거예요. 철학과도 취업 잘됩니다!” 라고 학생들을 안심시킨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뼈를 때린다. 물“론 철학 학계는 아니지만요.” 진로가 불투명하다는 사실이 나를 실망시킨 적은 없다. 철학과의 어려움이 당연한 이유는 답이 정해진 질문을 반박하는 ‘불온한’ 인간을 사회가 바랄 리 없기 때문이다. 불어에 philosopher, 즉 ‘철학하다’ 라는 동사가 있듯이 우리는 유용한 지식을 외우는 대신 의심을 품고 사유하는 법을 단련한다. 앞으로의 삶에서 선택의 순간이나 신념에 반하는 사건을 마주할 때, 우리는 결코 철학하는 자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대학이 취업 양성소로 전락해버린 이 시대에도 여전히 철학이 삶을 과제로 삼는 학문으로 남는 이유다.






1. 내년부터 EU 국가 출신이 아닌 유학생들의 국립대학 학비가 16배 오를 예정이다. 11월 23일 학비 인상에 반대하는 집회에 다녀왔다.
2. 몇 주 전 유네스코에서 열린 La nuit de la philosophie, 철학의 밤. 강연자들이 아침까지 무려 12시간 동안 강연을 이어갔다.
3. 한국의 겨울에 뜨끈한 오뎅 국물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감기약으로 불리는 뱅쇼(Vin chaud)가 있다. 시장에서 솥에 끓인 와인을 마시는 계절이다.
4. 올해 처음 배우기 시작한 라틴어. 라틴어로 쓰인 데카르트의 <성찰>을 프랑스어 번역과 비교해가며 읽고 있다. 프랑스어가 주는 고통이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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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진 (철학) sirongsae@gmail.com
  • GLOBAL EDU 유학생 해외통신원 (2018년 12월 12일 8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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