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수능 발언의 파장이 계속되고 있다. “학교 수업에서 접하지 못한 어려운 문제가 수능에 출제돼 학생들이 사교육 시장에 내몰리고 있다”고 질타한 뒤에 교육부 대입 담당 국장 경질,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 원장 사퇴가 이어진 것. 이후 정부와 여당은 초고난도 문항을 뜻하는 ‘킬러 문항’ 출제 배제 방침을 밝혔다.
이에 수능이 5개월 정도 남은 수험생은 물론, 교육 정책 변화에 예민한 학생·학부모들까지 혼란을 표했다.
수능 초고난도 문항을 둘러싼 이번 이슈를 진단했다.
취재 정나래 기자 lena@naeil.com
도움말 김용진 교사(경기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영석고등학교)·이치우 입시평가연구소장(비상교육)
전천석 소장(삼선대학입시연구소)
수능 5개월 전 폭탄 발언? 기존 출제 방향과 큰 차이 없어
이번 논란은 윤 대통령이 15일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교육 개혁 추진 상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촉발됐다. 초고난도 문항, 일명 ‘킬러 문항’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윤 대통령은 “공교육 교과과정(교육과정)에서 아예 다루지 않는 비문학 국어 문제라든지 학교에서 도저히 가르칠 수 없는 과목 융합형 문제는 처음부터 교육 당국이 (수험생을) 사교육으로 내모는 것으로서 아주 불공정하고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민들은 이런 실태를 보면 교육 당국과 사교육 산업이 한통속(카르텔)이라고 생각하게 된다”고도 덧붙였다. 결국 19일 정부와 여당은 수능 초고난도 문항 배제 방침을 세웠다.
대통령이 수능 문항에 대해 직접적인 발언을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사회적 파장은 상당하다. 당장 5개월 뒤 치러질 수능의 출제 방향을 바꿨다는 점에서 학생과 학부모의 반발이 거셌다. 야권에서도 ‘대입 4년 예고제’에 어긋난다며, 수험생의 혼란을 야기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반면 교육계에서는 대통령 발언의 방향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지나치게 어려운 초고난도 문항이 1~2등급을 가르면서, 이 문항과 관련한 정보를 얻거나 실전 문제 풀이 연습을 하는 사교육이 성행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 최근의 출제 기조도 쉬운 수능을 지향했다. EBS의 2023학년 수능 오답률 추산에 따르면 오답률 90% 이상의 문항이 출제된 것은 수학과 <사회·문화>뿐이었다.
사교육 근절? 불안감에 확대될 수도
다만, ‘고교 과정 내에서의 출제’ ‘사교육 카르텔’ 발언과 관련해서는 고교 교육에 대한 이해 없이 정치적으로 접근했다고 비판했다.
다수의 고교 교사는 “수능 문제는 고교 교육과정 내에서 출제한다. 수능 출제·검토 위원에 현직 교사들이 포함된 이유도 학교 수업과 학생 상황을 고려하기 위해서다. 특히 대통령이 콕 집은 국어 비문학은 <독서>에서 출제된다. ‘독해력’을 키우는 과목으로,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추론적 이해’와 ‘비판적 이해’가 강조됐다. 말 그대로 추론하고 비판하는 여러 단계의 사고 과정을 거쳐야 지문을 이해하고 답을 찾을 수 있어 ‘사고 역량’을 더욱 요구한다. 수능 문제에도 이런 변화가 반영됐다.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지문의 소재만 보고 격앙된 것 같다”고 진단했다.
초고난도 문항 배제를 통한 사교육 근절 대책은 실효성이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우선 수능을 약 150일 앞두고 ‘변수’가 나타난 셈이라, 학생·학부모의 불안감이 커지고 사교육에서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는 ‘모순된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며 우려했다. 실제 대표적인 학원가인 대치동에선 초고난도 문항보다 덜 어려운 ‘준킬러 문항’ 대비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바꿔주고 맞춤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카르텔 좇으며 진짜 문제는 외면
또 초고난도 문항이 배제되면 최상위권 내에서 변별력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게다가 실수 한 번으로 등급이 바뀌어 지원 가능한 대학 라인이 급변하는 경우가 더 늘어날 전망이다. 결국 N수생이 늘고, 이는 다시 재수 학원 등 사교육비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현재 선호도 높은 서울 주요 대학의 정시 비중이 40%에 달하고 의대 쏠림도 심화되는 추세라 ‘고시 낭인’ 같은 ‘수능 낭인’을 대거 양산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즉, 초고난도 문항·사교육 카르텔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전, 수능 대비에 막대한 학원비를 쏟아붓게 하는 현 입시 제도·사회 구조에 대한 근본적 고찰과 대책이 우선됐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한 과학 교사는 “과도하게 난삽한 지문과 꼬인 문제로 사교육을 유발하는 수능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다면 탐구 영역을 꼬집었어야 했다. 문제 하나당 1분 내외로 정답을 찾아야 하는데, 변별을 위해 과학 문제를 수학 계산 문제처럼 낸다. 초고난도 문항에 대한 정보의 격차가 가장 크고, 경제력이 높을수록 사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수능 영역이 탐구다. 특히 정시 확대 이후 학교 수업에서 수능 대비, 즉 문제 풀이 수업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원인이 이리 뚜렷한데, 대통령과 정부는 사교육 카르텔 관련자들을 찾아 응징하려는 것 같다. 교육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보다 정치적 의도가 뚜렷해 보여 아쉽다”고 성토했다.
수능의 역할을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양대 교육학과 박주호 교수는 “현재 사교육이나 대입 논란에서 문제는 수능의 난도가 아니다. 과도한 입시 경쟁 사회에서 수능으로 줄을 세우려니 여러 문제가 파생되는 것이다. 변별을 위해 전문가에게도 어려운 지문을 제시하거나 꼬아서 초고난도 문제를 낸다. 이를 접한 학생과 학부모는 수능 대비가 안 되는 학교 교육을 불신하고 사교육에 투자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 쉬운 시험을 내면, ‘변별 실패’라며 비판한다. 수능의 기능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도입 취지처럼 배운대로 쉽게 내 대학에서 공부할 역량이 있는지만 살피고, 변별은 대학의 몫으로 넘겨야 한다. 사실 공교육이라는 게 대학을 보내기 위한 교육이 아니다. 바람직한 인간 형성이라는 목표에 맞게 학교 교육을 정착시키는 게 정부의 목표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4 수능 어떻게 나올까?
대통령의 강력한 지시로 올 수능에서 초고난도 문항은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단, 체감 난도는 다를 수 있다. 경기 동대부영석고 김용진 교사는 “국어는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비문학, 즉 <독서> 지문을 EBS 교재에서 그대로 가져오는 방식으로 출제하면 체감 난도가 확실히 낮아진다. 반면 수학은 좀 다르다. 대부분의 학생은 초고난도 문항을 포기하고 맞힐 수 있는 문제 풀이에 집중한다. 한데 초고난도 문항보다 쉬운, 풀어볼 만한 고난도 문항이 나오면 시간을 투자한다. 아주 어려운 두 문제가 사라진 대신, 적당히 어려운 문제가 늘면 시간 배분 실패나 실수에 의해 중상위권 학생의 평균 성적이 하락할 수도 있다”고 예측했다.
정시에서 교차지원이 심화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비상교육 이치우 입시평가연구소장은 “수학은 학생 간 격차가 큰 과목이다. 국어가 쉽게 출제되면 국어-수학 간 표준점수가 벌어질 수 있다. 이 경우 자연 계열 지망 학생들이 합격선이 더 높은 대학의 인문 계열 전공으로 지원·합격하는 ‘문과 침공’이 심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단 다수의 전문가들은 대다수 수험생은 이번 사태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미디어 보도를 보고 과도하게 불안감에 휩싸이거나, 바뀐 수능을 대비하기 위해 사교육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 삼선대학입시연구소 전천석 소장은 “상당수의 학생들에게 초고난도 문항 배제는 호재로 작용할 것이다. 섣불리 예단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차분히 준비해나가길 권한다. 특히 고난도 문항을 빠르고 정확하게 풀어내는 연습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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