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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칼럼

929호

COLUMN

시인의 눈으로 본 학교 ①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

조향미 교사(부산 만덕고등학교)

학생들이 책 읽기를 좋아하고, 자유로이 글을 쓸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면 좋겠습니다. 언제든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사람, 더불어 사는 주체적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학생들에게 ‘소녀 향미’로 불린 적도 있지만 이제는 민망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문학을 좋아해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고, 아이들과 배우고 가르치며 평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을 생의 가장 큰 축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봄 꿈> 등의 시집과 <시인의 교실> <우리의 문학수업> <작전명 진돗개> 등의 산문집을 펴냈습니다.


학생과 교사가 함께한 독서 모임

1학년 학생들의 ‘독서 모임’이 만들어졌다. 나는 지도 교사로 참여할 작정인데, 기존에 해오던 교사독서회와 첫 모임 날짜가 겹쳐서 두 모임을 같이해보기로 했다. 먼저 교사와 학생 모임을 따로 진행하다가 1시간쯤 뒤에 합쳐서 이야기를 나눴다. 책은 심윤경의 성장소설 <설이>를 읽었다. 가족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교육과 성장에 관한 주제라 학생-교사가 함께 토론하기에 좋은 책이었다.

설이는 갓난아기일 때 보육원에 버려졌다. 두 번 파양을 당한 뒤, 설이가 아기 때부터 보육원에서 일해왔던, 다른 가족이 없는 ‘이모’와 같이 살게 된다. 영특하고 자기 생각이 분명한 설이를 이모는 친부모 못지않은 사랑으로 양육한다. 한편 설이의 동급생 시현이는 풍족한 환경에 사는데 특히 소아과 의사인 아빠가 교육에 열성적이다.

설이 이모와 시현 아빠는 모두 아이를 좋아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지만 부모의 역할 면에선 매우 다르다. 이모는 가난하고 많이 배우지 못해 설이에게 많은 것을 제공해주지 못하지만, 설이를 전적으로 믿기에 한껏 자유를 준다. 시현 아빠는 아들에게 좋은 것은 다 해주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에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현은 아빠를 무척 싫어한다. 자신이 제일 잘하는 노래하고 춤추는 일은 무시하며 의사가 되기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설이도 이모가 썩 마땅치는 않다. 이모는 자신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것처럼 보이는 탓이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 나서 부모의 역할과 교육 방식에 대해 자연스런 토론이 이어졌다. 어떤 부모가 자식의 참된 성장을 돕는 사람인가. 내 부모는 어떤 유형이며, 나는 어떤 유형의 부모가 좋은가. 자녀를 둔 교사들은 스스로 어떤 부모인가에 대해서도 돌아본다. 파머 파커의 말처럼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난제인 ‘자유와 강제의 조화’가 토론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사랑하지만, 상처 입는 소통의 단절

학생들은 자신들의 부모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자기가 시현이 같다는 아이들은 부모의 강제가 매우 싫다고 했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부모 때문에 공부하기가 싫어진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얼굴이 우울하다. 그러자 조용히 있던 한 아이가 말했다. 자기 부모는 ‘이모’ 유형인데 시험을 잘 쳐도 별로 칭찬하지 않고, 못 쳐도 야단치지 않아서 공부해야 할 동기를 잘 못 느끼겠다고 했다. 시현 아빠 유형의 부모를 둔 아이들은 이모가 좋아 보이지만, ‘이모’의 자녀들은 ‘시현 아빠’가 자식에게 더 사랑을 쏟는 것처럼 느낀다.

모임 학생 전체에게 물으니 부모가 이모 유형이라고 답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요즘 부모들은 시현 아빠 같은 유형이 많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였다. 도시 변두리에 위치한 학교의 특성인지도 모른다. 생활에 쫓기는 바쁜 부모이거나, 자유로운 교육관을 가졌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전자가 더 많지 않을까 싶다. 그 아이들은 이모와 같은 부모에게 좀 아쉬운 마음이 있는 듯했지만, 불만이 많아 보이진 않았다. 부모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현 아빠처럼 자식을 자기 뜻대로 ‘푸시’하는 부모의 자녀들은 달랐다. 학원을 마음대로 등록하는 엄마, 자기 인생과 꿈에 대해서 미처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장래 직업까지 정해주는 아빠에 대해서 상기된 얼굴로 비판했다. 이제껏 따르긴 했지만 갈수록 반발심이 커진다고 했다. 부모님께 그런 마음을 말해봤느냐고 물으니, 시도해봤지만 부모의 힘에 맞설 수가 없단다.


[ 대체 그 부모 노릇이 무엇이기에, 부모와 자식 간의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들이 이렇게 자식을 옭아맬까. 다들 한 번쯤 듣고 자란 말, 다 너를 위해서야,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야. 그런데 그런 말을 들은 자식은 단 한순간도 행복할 수가 없다. 사랑을 받으면 행복해야 하는데, 그 사랑 안에서 자유로워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다. 자식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을 구실로 한 속박이 아니라, 사랑을 전제로 한 온전한 믿음과 지지다. 그것만이 아이를 자유롭게 하며, 자신의 독특하고 온전한 방식으로 세상이라는 틀을 깨고 나올 수 있게 한다. _한 ]


아빠를 외면하는 시현의 마음에 정말 공감된다는 학생이 써보낸 소감의 일부분이다. 얼마 전 ‘대화’를 주제로 한 수업에서도 부모와의 소통 문제에 대해 글을 쓴 아이들이 많았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사랑하는 줄은 알고 있으나, 잘 표현하고 잘 이해하지 못하여 상처 입고 종종 대화가 단절된다.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는 부모 때문에 자신은 ‘말이 몸 안에 가득 차서 목이 붓는 듯했다’고 쓴 아이도 있었다.


사실 신의 대역을 맡은 부모처럼 어려운 역할도 없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유와 강제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휘청거리기도 한다는 것을 자식들이 알아주기를.


아이들의 입을 통해 듣는 ‘부모의 역할’

교사들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안타깝게 들었다. 교사도 자유와 강제의 조화 속에서 갈등하는 부모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듣는, 부모의 역할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는 명료해 보였기 때문이다. “너희 나이에는 부모님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지만, 결국엔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선생님들은 공통적으로 말했다.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선택으로만 살았다는 선생님, 부모가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절충한 선생님, 부모는 관여할 여력이 없었기에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며 살았다는 선생님들은 나름대로의 인생 경험으로 아이들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정말 이건 아니다 싶으면 부모님을 설득해라. 설득하려면 먼저 신뢰감을 주어야 한다. 학업만이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믿음직스런 모습을 보이면 부모님들도 너희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실 것이다. 그래도 힘이 달리면 선생님들도 도와줄게.”

이런 대화 자리에 부모들이 함께했으면 싶었다. 아이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아이들의 생각이 얼마나 또렷하고 의젓한지. 이런 말을 하는 학생들은 대체로 자기관리 능력이 우수한 아이들이었다. 부모들이 그렇게 억누르지 않아도 스스로 조절하면서 잘해나갈 수 있을 모범생들이다. 그동안 부모의 강제가 아이들에게 그런 자기관리 능력을 키워주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부턴 아이들에게 자유의 폭을 조금씩 넓혀주는 것이 좋을 텐데. 덜 자란 현재의 작은 틀 안에 미래를 가두려는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든다.


자유와 강제 사이, 부모도 흔들리는 존재

부모의 역할에 대한 진지한 독서와 토론은 가족, 핏줄, 나아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로 이어진다. 다음과 같은 수준 높은 글을 읽으면 교사들은 기쁘다.


[이모와 설이는 피가 이어지지 않은 남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모는 설이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기대는 없다. 무관심하다기보다는 설이를 자기 딸, 피가 이어진 사람, 내 분신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설이’라고 보는 것 같다.

반면 시현이는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과 기대를 받고 자랐다. 설이가 태어나면서 줄곧 받아온 관심이 동정에 가깝다면, 시현은 두 사람의 애착이다. 나는 시현에게서 투명하게 나를 볼 수 있었다. 부모님이 가진 콤플렉스를 받기도 하고. 뭐든 잘하라고 뭐든 제공받는다. 비록 시현이 아버지가 시현이를 ‘시현이’라고만 보는 것 같지는 않지만 나쁜 부모라고는 할 수 없다.

나는 이 두 아이의 사례를 읽으며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은 부모일까 생각했다. 왜냐면 나는 두 가지 사례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부모님께 큰 기대를 받지 못하고 자라셨다. 엄마는 그래서 항상 자기가 지원을 받았었더라면 하고 생각하신다. 하지만 반대로 엄마는 내게 너무 관심이 많다. 내가 생각하는 내 그릇보다 큰 기대를 가지고 계셔서 나는 가끔 시현이처럼 숨이 막힌다.

이렇게 양극의 두 부모의 사례를 알고 보니 책을 읽고 나서 생각이 많았다. 부모란 뭐고 누군가를 기른다는 것은 뭘까? 이모와 설이가 피가 이어져 있었다면 어땠을까. 피로 모든 게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점을 중요 하게 생각한다. _영]


부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식의 불행이다. 그래서 자식이 행복하게 살도록 온갖 좋은 것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때로 그 행위 자체가 자식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실 신의 대역을 맡은 부모처럼 어려운 역할도 없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유와 강제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휘청거리기도 한다는 것을 자식들이 알아주기를. 행복과 불행은 인간의 의도와 무관하게 닥치기도 하는 것을 간파한다면, 그래서 겸허를 실천할 수 있다면 모두는 훨씬 평화롭고 행복할 것이다. 하나의 정답은 없지만 다음과 같은 자식-학생들의 후기에서 부모선생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난 지난 모임에서 나의 얘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내가 이때까지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얘기를 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가 조금이나마 말한 얘기에 선생님들께서 공감해주시고 조언도 해주셔서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이 모임에 참여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_]


[나의 부모님은 설이 이모 같은 분이신데, 나는 부모님께 완전히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현이 부모님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자녀가 하고 싶은 꿈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가 자녀에게 100 % 완벽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도 인생에서 처음으로 부모이기 때문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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