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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칼럼

937호

COLUMN

시인의 학교 ③ 삶을 위한 교육의 장 ‘학교’

조향미 교사(부산 만덕고등학교)

학생들이 책 읽기를 좋아하고, 자유로이 글을 쓸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면 좋겠습 니다. 언제든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사람, 더불어 사는 주체적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요. 어릴 적부터 문학을 좋아해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고, 아이들과 배우고 가르치며 평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을 생의 가장 큰 축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봄 꿈> 등의 시집과 <시인의 교실> <우리의 문학수업> <작전명 진돗개> 산문집을 펴냈습니다.


얼마 전 ‘2019 국가 교육과정 미래 교육포럼’에서 ‘국민이 원하는 미래 한국 교육의 방향과 과제’라는 제목의 설문조사 자료를 읽었는데, 결과가 흥미로 웠다. 의미 있는 응답이라 통계를 인용해본다.





‘경제적 양극화’와 교육 정책

먼저, 한국 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인구 감소나 인공지능 등 새로운 기술의 발전보다 ‘경제적 양극화’를 꼽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그런데 이 응답은 현재 추진하는 교육 정책의 방향을 봐도 정확한 진단이다. 대학 입시에서 정시를 40 % 이상으로 확대한다는 발표가 중등 교육 현장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다. 고교 생활과 완전히 무관하게 수능만으로 대학 진학을 결정하는 비율이 절반에 좀 못 미치도록 한 것은 올바른 교육적 판단이라고 여겨지지 않지만, 이런 정책을 발표한 것은 역시나 부의 양극화 때문이었다. 수시-학생부 전형이 공정하지 않다는 일반적인 여론, 즉 경제적 부에 따라 대학 입시가 결정된다는 인식이 교육 정책을 바꾸게한 것이다.

수능에 맞춘 학습은 고교학점제나 창의 융합 인재를 기르자는 미래 교육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국민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정시 전형이, OMR 카드 리더기가 점수를 매기는 수능 시험이 가장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까지의 통계로 볼 때 학생부 종합 전형보다 수능에서 빈부에 따른 차이가더 났다지만, 사람보다 기계를 더 믿게 된 것이 현재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정시 확대와 관계없이 학생부를 위한 고액 컨설팅, 엄마가 대신해주는 수행평가 등으로 교육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다. 고액 컨설팅이 교사가 작성하는 학생부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엄마가 대신해준 수행평가를 교사가 왜 골라내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현실인 모양이다. 수행평가는 과제형을 없애고 수업 중에 하도록 한다지만, 지금도 여러 교과에선 그렇게 하고 있다.

국어과의 경우 교과서 분량도 줄어들어 수업 중에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다. 물론 완전히 마무리가 안 된 경우 집에서 해오도록 시간을 조금 더 주기는 한다. 또 프로젝트 수업, 캠페인 활동,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활동은 방과 후 시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과도한 학습 부담을 줄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교육적 목적보다 교육 외적 요소. 즉사교육의 극성으로 인하여 여러 정책들이 나오는 것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위한 교육에 손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통계를 보면 국민들은 교육의 참된 목표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 여러 문항의 응답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키워드는 ‘삶’이다.

교육은 올바른 인간-시민을 키우는 것이어야 하고, 삶을 성장시키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학생들 또한 마찬가지 다. 어떤 배움을 원하는가, 어떤 배움이 나에게 의미 있는가에 대해서 학생들의 판단은 거의 일치한다. 성적이 낮든 높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참된 배움에 대한 지향은 모든 학생들이 가지고 있다.

2학기 기말고사를 끝내고 방학을 앞둔 시점에 ‘학생이 말하는 수업’이라는 활동을 했다. 한 반의 학생이 모두 둘러앉아 담임 교사의 진행에 따라 한 해의 배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활동이다. 컴퓨터 앞에서 홀로 평가하는 교원 평가보다 이런 활동이 더 의미 있다. 학교의 여러 프로그램과 교사의 수업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스스로 배움의 태도가 어떠했는 지, 잘 배우는 친구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 는지 서로 이해하고 배우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우리 학생들이 가장 좋게 평가한 것은 대부분의 교과에서 진행되는 모둠토의 수업 이었다. 교과 내용만이 아니라 소통과 협력의 능력을 기르는 데도 의미 있기 때문 이다. 중학교 때까지는 모둠수업이 잘되지 않았지만, 모둠에 피해를 주기 싫어서라도 열심히 하게 되었다는 답변들도 제법 많았 다. 모둠을 구성할 때는 리더가 될 만한 학생과 배움의 속도가 느린 학생들을 함께 묶어주는데, 모둠 발표는 리더 학생들보다 오히려 좀 뒤처지는 친구들이 맡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이 서로 역할 분담을 하며 친구들을 배움에서 소외시키지 않으려 배려 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지식과 감성과 몸의 활동을 함께한 수업에 대한 호감도도 높았다. 삶 속에서 진행된, 삶과 연관된 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과의 위안부 프로젝트 수업에 대해 좋은 평가를 했는데, 아주 총체적인 수업이 었기 때문이다.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모둠별 계획 후 프로젝트 활동이다. 그림을 그리고 스티커를 만들기도 하고, 초등생이나 중학생들을 만나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팀도 있고, 팻말과 모금함을 들고 거리에 나가 서명을 받고 모금 활동을 하는 모둠도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시민들이 역사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부를 체득한다. 아마도 이런 활동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음악 시간에 한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모둠별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대본으로 짜고 연기와 노래를 하며 무대에 서보는 경험은 얼마나 풍부한 수업인가.

학창 시절 일어서서 발표를 한 경험도 거의 없는 우리 시대를 생각하면 역사의 진보를 믿게 된다. 과학, 수학, 정보와 같은 이공계 과목도 학생들은 실험 이나 체험을 통한 수업에 호감을 표현했다.

수업 시간에 책 한 권을 읽고 긴 서평을 써보는 국어 시간의 활동, 자신들의 언어 생활을 소재로 한 상황극 수업도 자신의 능력을 키워주는 배움이라고 말했다. 독서를 싫어하는 학생들도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게 다룬 소설을 꼼꼼히 읽으면서 독서의 가치를 발견하고, 책 읽기가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것이다. 이런 것이 삶과 연관된, 삶의 의미를 찾는 배움이다.

의미도 모르고 무조건 외우고 문제를 푸는 공부보다 이 배움이 어떤 의문과 진실을 밝혀내는지, 어떤 삶에 쓰이는지를 인지하면 훨씬 잘 배운다. 인간과 사회와 자연세계에 대한 진실을 깨쳐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거움이다. 배움의 주체가 되려면 스스로 무엇을, 왜, 배우는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배움은 수업 시간, 교과서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친구들과 사귀고 선생님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세상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 능력을 키워 가는 것이다.

학교가 아니면 이렇게 많은 선후배 동료들을 만나고 관계 맺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학교는 총체적인 학습 공간이다. 마을 공동체가 사라지고, 가족도 점점 축소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학교가 배움과 우정의 공동체 역할을 할수 있다.


‘학교’라는 배움과 우정의 공동체

그런데 ‘학교’라는 말에서 먼저 시험과 성적을 떠올리게 되면 공동체로서의 기능은 사라지고 피터지게 경쟁하고 싸우는 전쟁터가 된다. 친구와의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학생들은 친구를 사귀고 경쟁자인 친구를 좋아한다. 삶이란 원래 그러한 것이 아니던가. 산다는 것을 달리 보면 죽음에 점점 더 가까이 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일이든 자유와 강제, 의무와 욕망이 뒤엉켜 있는 것이 생명체, 특히나 인간의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 학생들 을 삶의 모순성을 받아들이고 모순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학교라는 배움 공동체 또는 우정 공동체의 역할에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 학생들이 몇 있다.

입학하고부터, “저는 공부가 필요 없는데 요”라며 배움 자체를 거부하던, 시간 맞춰 등교하는 것도 잘 못 해내던 학생이 결국 학교를 떠났다. 학교만이 배움의 공간은 아니니 세상이라는 더 큰 학교에서 더 배우고 성장하리라 믿지만, 그러나 끝내 떠나는 손을 붙잡지 못하여 마음이 아프다.

왜 배움을 그렇게 편협하게 생각하게 되었 는지, 왜 공부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에 대해선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답이 나온다. 그런 학생들이 생각하는 공부란 교과서를 통한 지식 공부이며, 그런 공부에서 성공의 경험이 없으니 배움 자체를 외면하게 된 것이다. 시험 점수가 낮아 꼴찌를 하더라도 학교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니건만, 점수로 매길 수 없는 배움과 성장은 얼마든지 있건만. 학생이 학교를 떠난 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기보다 학교가 아직 품이 좁고 덜 유연해서, 삶을 키우는 교육이 부족해서일테다. 미안하구나 아이야. 날것의 세상에서 더씩씩하게 잘 배워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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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UMN 특별기고 (2020년 01월 08일 9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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