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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칼럼

945호

COLUMN

2020 시인의 학교 ⑤ 작별 인사

조향미 교장(부산 충렬고등학교)


학생들이 책 읽기를 좋아하고, 자유로이 글을 쓸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면 좋겠습니다. 언제든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사람, 더불어 사는 주체적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요. 시를 쓰는 국어 선생이었다가 평교사 출신 공모 교장이 되었습니 다.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 모두가 행복하게 배우고 성장하는 학교, 푸른 느티나무 아래서 시 읽는 소리 낭랑한 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봄 꿈> 등의 시집과 <시인의 교실> <우리의 문학수업> <작전명 진돗개> 산문집을 펴냈습니다.



3월부터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만덕고가 ‘다행복학교(부산 혁신 학교의 명칭)’로 출발할 때 왔다가 5년 만에 떠난다. 공립학교 교사들은 몇 년 만에 한 번씩 치르는 인사 이동이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평교사에서 공모제 교장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오랫 동안 승진의 길과는 무관하게 살다가 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알 수 없는 인연의 힘일 테다. 또한 늘 마음에 품어왔던 행복한 배움 공동체에 대한 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부임지인 충렬고도 물론 다행복학교다.



아이들에게 남긴 작별 인사


종업식을 마친 오후에 인사 발표가 나서, 학생들에게 작별 인사를 못했다. 작년에 1학년 부장을 했기 때문에 적어도 1학년 학생들 에게는 알려야 했다. 교장 선생님은 영상을 찍어서 개학날 틀자고 하셨지만, 나는 영상보다는 글이 편했다. 소식을 알려야지 하면서도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다른 얘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개학이 연기된다는 결정이 나기 며칠 전, 마음을 가다듬고 노트북을 열었다. 막상 작별 인사를 하려니 남겨둔 아이들이 애틋하고 떠나는 마음이 아쉬워서 글이 길어졌다.


2쪽짜리 글을 써서 8개 학급의 국어 단톡방에 올렸다. 반의 특성에 맞춘 몇 줄의 인사말 외에 다 같은 내용이었다. 단톡방에 글을 올리는 것은 늘 조금 망설여진다. 말을 던졌는데 받는 이가 없으면 민망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생이 작별 인사를 하는데 학생 들이 침묵한다면? 설마, 우리 학생들이 그 정도로 예의도, 소통 능력도 없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올린 글을 다 읽었을 즈음, 반마다 답신이 떴다.


“선생님 가지 마요 ㅠㅠ”


“선생님이랑 수업해서 좋았습니다 ㅠㅠ 국어 시간 재밌었는데 다른 선생님이랑 수업을 해야 하네요 ㅠㅠ 선생님도 코로나 조심하 시고 항상 건강하세요.”


“1년 동안 정말 정말 감사했습니다. 선생님의 피드백과 수업 덕분에 글 쓰는 법을 조금 더 잘 알게 되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


“1년 동안 수업 잘 들었고, 감사했습니다. 건강 관리 잘하시고 교장 선생님 되신 거 축하드립니당.”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저 답신들 중에 가장 짧으면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건 “선생님. 가지 마요 ㅠㅠ”였다. 이별을 서운해하는 이런 답신 하나 없었다면 쓸쓸했을 것이다. 제일 감정이 안 느껴지는 인사는 “수고 많으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다. 아무 답신도 안 보내는 것보다야 낫지만 조금 서운한 인사다. 계산을 끝내고 고객을 보내는 점원 같은 느낌이랄까. 너무 건조하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에 대해서는 학생들에게 몇 번 말을 했었다. 어떤 도움이나 혜택을 준 어른 에게 나이 어린 사람이 수고했다, 고생했다고 말하는 건 예의에 맞지 않다, 그 말은 뭔가를 받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말이 아니 니, 그보다는 ‘감사합니다’로 하라고 가르쳐도 잘 잊어버린다. 주체의 마음이 싹 빠진 ‘수고하셨습니다’ 뒤에 바로 ‘안녕히 가세요’ 라는 인사는 선생의 애틋한 편지를 너무 빨리 넘겨버린 것 같다. 여러 번 개인적인 대화도 나눈 아이들이지만, 썩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말았다.



각양각색 학급별 단톡방의 모습


평소에 담임 교사가 단톡방 예절을 많이 가르친 학급은 반응이 달랐다. 선생님이 단톡방에 글을 올리는데 답을 안 하는 그런 예의 없는 학생이 되어선 안 된다고, 예의를 유달리 강조하면서도 학생들과 아주 밀착해서 교육하는 담임 선생님이었다. 꾸준한 교육 효과도 있었을 테고, 학생들 자체의 성향도 밝아서 다정한 말들로 답신을 했다.


한편 평소에 너무 말이 없는 학급, 어쩌면 얘들은 이렇게 조용할수 있지.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드는 반은 역시나 답신도 건조한 인사 둘. 말을 좀 하라 하니 다시 셋. 이 정도였다. 평소 여러 개의 단톡방에서 눈만 뜨고 지켜보기만 하는 이들을 허다하게 봐왔기에 새삼스럽진 않았지만, 모든 학급이 그랬다면 글을 올린 걸 후회했을 것이다. 사실 단톡방을 소통의 공간으로 보기보다, 전달 사항 받는 게시판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도 많을 것이다. 선생님의 작별 편지도 그런 정도로 읽은 아이들도 적지 않을 테고.


그래도 얼굴이 떠오르는 아이들이 몇 있었다. 그 애는 답을 할 만한데 인사 한마디 없을까 싶은. 잘한다고 자주 칭찬해줬던 아이, 꾸중도 했지만 변화하는 모습을 기뻐하고 격려해준 아이. 사실 생각하면 많았다. 그러나 아이들 마음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여러 아이들이 작별 인사를 해주니 고맙고,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깨어 핸드폰을 열어보니 장문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지난 호에 이 칼럼에 소개했던, <고백>이라는 소설을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던 학생이다. 안그래도 그 녀석 말 한마디 없네 생각했었다.


“제 오락가락하는 성격 때문에 여러 선생님들과도 많은 충돌이 있었고 선생님과도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잘못 잘 잡아주시고 그 이후로도 좋은 마음으로 다가와 주셨던 거 너무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싶어요. 소설 읽고 소감 말하기할 때 제 과거 일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선뜻 마음 열기가 어렵고, 처음부터 가시를 세워서 남들에게 안 좋게 보인다라고 털어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이후로 저한테 다가오는 1학년 담임 선생님들이 제가 날카롭게 다가가도 다 아신다는 마음으로 다가와주시는 게 느껴졌어요. 선생님은 저를 따로 불러서 그런 일이 있었 구나 하고 이해해주시고 토닥여주시는 것도 다 감사했어요. 선생님 덕분에 남은 1학년 잘 보낸 것 같아요.”


편지의 일부다.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이야기의 차원으로 격상한 글이다. 담임들 단톡방에 전달하니, 모두들 기뻐한다. 교사들이 가장 기쁠 때는 이렇게 성장하는 아이를 볼 때이다. 이 편지 한 장으로 말 없는 아이들에 대한 씁쓸한 마음도 사라졌다.


그런데 한 학급이 한마디 답신도 없었다는 것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부담임을 하는 학급이다. 원래 표현을 잘 안 하는 애들이긴 하지만, 아예 한마디도 안 하다니. 이건 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흠,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귀찮아도 국어 수업 AS 를 해야겠다. 말을 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를 구분하고, 할 말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국어 교육 아닌가. 다시 글을 썼다. 선생님이 작별 인사를 하는데, 답신 한마디 없는 너희는 왜 그럴까? 내가 무얼 잘못했나? 말을 못 하는 거니, 안 하는 거니? 말을 할 상황에서는 말을 해야 서로 이해할 수 있단 다. 말을 안 하면 오해하게 되지. 말을 해보렴.


그래도 단톡방은 고요했다. 한두 시간 지나서 카톡을 열어보니 단톡방은 여전히 개미 한 마리 지나간 흔적이 없는데, 반아이들로부터 개인톡이 와 있었다. 아무도 말을 안 해서 단톡방에는 못 올리겠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풀어낸 아이 들이 몇 있었다.


“사실 어제 선생님께서 반톡에다가 장문의 글을 올려주셨을때 읽어보고 마음 한편이 왠지 모르게 찡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따뜻하고 생생한 글들이었다. 학생이 이런 마음을 갖고 있어도 표현하지 않았으면, 선생은 내심 상처받으며 앞으로는 이렇게 말을 건넬 시도를 잘 안 하게 될 것이다. 눈치 보지 않고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것, 자유로운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누구나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학교’ 침묵의 단톡방이 남긴 화두


SNS, 특히 많이 이용하는 단톡방에서 말 때문에 자칫 상처 입기 쉽다. 그래서 전달사항 말고는 대화가 실종된 공간이 되어버린다. 업무를 주고받는 메신저는 그럴 수 있지만 아이들의 공부방은 그래선 안 되지 않는가. 누군가 마음을 담은 글을 올렸는데, 뭐라고 답을 하고 싶은데 눈치가 보여 말 한마디 못하는 경험을 되풀이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의사소통 능력, 공동체성은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지향하는 핵심 역량이다. SNS로 인하여 소통이 활발해졌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더욱 움츠러들고 눈치를 살피는 경향이 커진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고, 외국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종종 말한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별 생각이 없는데도 스스로 타인의 시선을 만들어 거기에 갇히는 경우도 많다. 지나친 자의 식이 문제다.


적막하게 비어 있는 단톡방을 보면서, 그리고 개인 메시지로 하나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이들을 보면서 시선의 문제를 다시 느꼈다. 이야기를 막는 것은 타인의 시선이다. 진솔하고 따뜻한 이런 글들이 전체 방에서도 자연스럽게 올라오면 또 다른 아이들도 이야기를 꺼낼 것이고, 별 생각이 없던 친구들도 느끼고 생각해보게 될 텐데.


제각각 마음에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서로 털어놓게 할 수 없을까. 그리하여 서로 잘 이해하고 배우게 할 수 있을까.


학급의 문제만이 아니다. 행복한 공동체는 자유로운 이야기가 통하는 곳이어야 한다. 누구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학교,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듣는 학교는 어떻게 가능한가. 새 학교에 새로운 직책을 맡으면서 큰 화두를 받아 안았다. 이것은 모두 그침묵의 단톡방 때문이다. 아이들과 개별로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주고받게 된 계기도 의례적인 ‘인사’ 한마디 못하는 그 침묵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생은 늘 이렇게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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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COLUMN 교단일기 (2020년 03월 11일 9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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