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를 둘러싼 논쟁 중 하나는 지역 격차다. 학생 수가 적으면 과목 선택권과 내신 평가에 불리한 만큼, 소규모 학교가 몰려 있는 비수도권이 구조적으로 불리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강원 폐광 지역에서 진행되는 학교 밖 교육 프로그램인 배움숲 공동 교육과정이 눈길을 끈다. 특정 과목이 아니라 진로·학습·진학을 연계한 수업을 제공해, 학생의 시야를 넓히고 역량을 쌓을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는 평가다.
취재 정나래 기자 lena@naeil.com
사진 배지은
폐광 지역 학생이 호응한
비대면 공동 교육과정
고교에서는 2018년부터 학생이 자신의 흥미나 진로, 적성에 맞는 수업을 스스로 골라 듣는 것을 강조하는 교육과정이 확대됐다. 한데 이 선택의 범위는 학교 규모가 좌우한다는 점에서 우려가 제기됐다. 실제 교육 당국은 온라인학교를 개교하고, 지역 내 대학·기관과 연계한 학교 밖 교육을 제공하며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강원 폐광 지역에서 진행되는 배움숲 공동 교육과정이 눈길을 끈다. 배움숲은 강원랜드의 후원을 받아 정선 태백 영월 삼척 등 인근 폐광 지역에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사업이다. 주요 대학의 입학사정관과 진학 전문가를 초빙해 교사 포럼 및 학생 진로·진학 상담을 제공해왔으며, 올해부터 한걸음 나아가 정선고·도계고·황지고를 거점으로 운영하는 공동 교육과정을 선보이고 있다. 고1·2를 대상으로 32시간 동안 수업을 듣고 평가를 마치면 2학점을 취득하는 정규 과정이다.
학생의 반응은 뜨겁다. 2026학년 2학기 기준, 강원도 내 공동 교육과정 신청자(304명) 중 약 30.9%에 달하는 94명이 배움숲 과정에 몰렸다. 과목당 평균 신청 인원은 15.6명으로 도내 전체 평균(7.2명)이나 춘천·원주·강릉 등 도시권(5.8명)의 2~3배에 달했다. 학교 간 거리가 멀고 학령인구가 적은 농어촌·폐광 지역에서 괄목할 만한 수치다. 실제 비슷한 환경의 타 지역 대학 연계 공동 교육과정은 폐강률이 58.4%에 달했고, 온라인 강좌조차 미달로 인한 폐강이 많았다.
보여주기 위한 심화 과목 아닌
석학의 범교과 융합 수업 눈길
학생들의 높은 호응의 배경에는 수업의 특색이 자리한다. 심화 과목이나 인공지능(AI)·로봇·보건 등 진로와 직결된 과목이 아니라 ‘미래사회핵심역량의 이해’와 ‘생성형AI와 메이커실습’이라는 융합교과 수업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 전자는 인문 성향, 후자는 자연 성향 학생을 겨냥해 미래 세대 필수 역량으로 꼽히는 문해력과 AI에 초점을 맞춰 설계된 수업이다.
좀 더 들여다보면, ‘미래사회핵심역량의 이해’는 독서·글쓰기·미디어 리터러시·데이터 분석을 결합한 수업으로 폐광 지역 재생, 고령화, 기후변화 등 강원 지역 현안을 탐구하고 강원 미래 공동체 설계안과 디지털 포트폴리오를 완성하게 된다. ‘생성형AI와 메이커실습’은 파이썬 프로그래밍의 기초부터 생성형AI 협업 코딩, 라즈베리파이 피코(Pico) 제어, IoT 센서 결선을 차례로 배운 뒤, 이를 활용해 생활 속 문제를 해결하는 메이커 작품을 제작하고 AI 디버깅 일지를 작성한다. 각 수업에서 익힌 내용은 교과 수행평가나 동아리·진로·자율 활동에서 자신들의 관심 분야 탐구에 활용하기 좋다. 서울 주요 대학과 지역 거점 국립대, 과학기술 특성화대학의 석학이 교단에 직접 선다는 점도 매력적인 요소라는 평가다.
서울대 권오현 명예교수는 “새 교육과정과 2028 대입의 핵심 역량(학업 역량, 진로 역량, 공동체 역량), 2028 대입의 기본 구조에 대해 수업했다. 역량을 많이 말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 어떻게 역량을 쌓고 평가받는지는 잘 모른다.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면서, 자신을 기준으로 학교생활과 전공, 대입의 준비 방향을 찾아가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단순히 성적·입시 유불리가 아닌 스스로 파악한 자신을 기준으로 삶을 설계하는 기초적인 방법을 안내하는 셈이라, 이후 학업이나 진로를 모색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원대 과학교육학부 변정호 교수(과학영재교육원장)는 “‘생성형AI와 메이커실습’ 중 ‘생성형AI로 만드는 바이브 코딩’ 수업을 진행했다. 환경 변화에 따른 코알라 개체군 변동 시뮬레이션같이 간단한 모델로 기초 활용법을 익힌 후 자신들의 관심 주제로 진행해보는 것이 골자다. 수업을 들은 후 다양한 교과·비교과에서 바이브 코딩을 접목해 탐구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강원 황지고에서 수업 중인 강원대 과학교육학부 변정호 교수.
학생 떠나지 않는 지역 교육 디딤돌 될까
배움숲 공동 교육과정은 향후 수업 계획서부터 평가 기준·방법 등의 콘텐츠를 일선 학교에 공유할 예정이다.
배움숲 안성환 사업단장은 “비수도권 소규모 학교에 대한 교육 지원 사업은 적지 않다. 한데 일회성 행사에 그치거나, 지역 실정에 맞지 않는 콘텐츠를 제공해 실질적으론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배움숲은 대학과 고교에서 다양한 학생을 교육·선발한 전문가들이 지역 환경에 맞는 교육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개발·운영한다는 차별점이 있다. 특히 학생들이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우는 시작점부터 함께해 지역 학생이라는 소외감을 벗어나 할 수 있다는 동기를 부여해주고, 관내 학교에 수업 모델을 비롯한 다양한 사례를 공유하며 전반적인 지역 교육 역량을 높이려 한다. 잘 자리 잡는다면 지역 인재 유출을 막아설 전환점이 될 것이다. 교육과정과 대입에 대한 이해가 높은 전문가들이 설계·운영한 교육 콘텐츠를 경험하고 싶은 이들이 지역을 찾는다면 교육 소외 지역이 아닌, 교육 선도 지역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 새로운 지역 맞춤형 교육 생태계 모델로 눈여겨볼 만하다”라고 강조했다.
/황지고 배움숲 수업 현장/
지난 9월 6일 강원 황지고에서는 ‘미래사회핵심역량의 이해’ 5~6차시 수업이 진행됐다. 지난 차시 학업·진로 역량을 다룬 데 이어 이날은 공동체 역량을 다뤘다.
권 명예교수는 “현대 사회는 구성원의 다양성을 추구한다. 다양한 사람이 섞이면서 나타나는 긍정적인 효과가 많지만, 동시에 갈등이 심화되는 부작용도 있다. 이를 완화하려면 상호 존중 및 시민 의식, 의사소통 기술, 관계 조율, 리더십 등이 필요한데, 이를 아울러 공동체 역량이라 부른다. 어떤 위치에서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갈등 상황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면 공동체 역량이 있는 셈이다. 이를 이해하면 대학에서 임원 활동 여부 자체로 공동체 역량을 평가하지 않는 이유부터 공동체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까지 알 수 있다. 단순히 남이 전해준 불명확한 대입 유불리 기준이 아니라, 교육과정과 대학 인재상·모집 요강에 공식적으로 언급된 내용에 바탕해 자신을 기준으로 학업과 미래를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강원 장성여고 1학년 전소연 학생은 “일반 수업에서 들을 수 없는 내용이라 흥미로웠다. MBTI와 비슷한 테스트지로 내 성향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친구 관계부터 독서, 효과적인 학습법을 찾는 법을 알게 됐다. 연기에 관심이 있는데 사람을 이해하는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됐다”라고 말했다.
황지고 1학년 서원호 학생은 “보건 분야에 관심이 있는데 대학에서 강조하는 공동체 역량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수업을 통해 막연했던 개념을 이해하고, 대입에서 평가되는 부분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라고 밝혔다.
강원 황지고에서 서울대 권오현 명예교수가 강의하고 있다.
MINI INTERVIEW
“인재가 머무는 지역 교육 생태계 만들고파”
Q. 프로젝트를 기획한 배경은?
지역 학생을 실제 만나보니 많이 위축돼 있었다. 목표를 세우는 단계에서부터 지역적 한계에 주저한다. 대입에서는 지역 거점 국립대의 교과전형 선발 규모가 크고, 수능에 대한 자신감이 낮다 보니 학생부교과전형만 염두에 두는 학생이 대부분이다. 한데 소규모 학교에서는 좋은 내신 등급을 받기가 어렵다. 설사 우수한 교과 등급을 얻는다 해도 선호도가 높은 주요 대학은 수능 최저 학력 기준이 높고 학생부 정성 평가의 반영 비율이 크다. 가장 결과를 내기 어려운 선택을 하고, 아쉬운 결과에 좌절하거나 지역을 이탈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지난 2년간 입시 정보 격차를 메우기 위해 서울대 동국대 등 대학 입학 관계자와 대면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한편, 실제 지역 진학 데이터를 분석해 공교육 진학 전문가와의 상담을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기본적인 교과 역량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되면서 진로·진학 면에서도 유의미한 경험을 줄 수업의 필요성을 느꼈다. 강원랜드의 후원을 받아 학교 밖 교육으로 제공되는 만큼, 특정 분야·성적대 학생을 위한 심화 과목보다 교과·비교과를 아우르면서 학생들이 스스로 관심 분야를 찾고 학교생활과 대입을 설계·실천하는 동기부여형 수업에 초점을 두고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Q. 강사진의 면면이 화려한데?
기초 이론을 탄탄히 알려주면서 참가 학생의 시야를 넓혀주려는 의도가 있다. 국내 학생부종합전형을 설계한 서울대 권오현 명예교수, 인공지능과 콘텐츠 분야 전문가인 동국대 정윤길 교수, 강원대 과학영재교육원장인 과학교육학부 변정호 교수, 복잡계·네트워크 과학 분야의 권위자인 켄텍(KENTECH) 김희태 부교수 등은 학생에게 수업 외적인 경험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해당 대학의 입학 전형이나 교육과정을 설계한 경험이 있어 전공·대입에 대한 정보도 전달할 수 있다. 다행히 학생들의 반응도 뜨겁다.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가 성적이 아닌 성장에 가치를 두고 수업에 참여하면 좋겠다.
Q. 향후 운영 계획은?
강원랜드가 석탄 산업 전환 지역의 교육 소외 현상을 극복하고 지역 인재의 성장을 지원하는 사업인 만큼 특정 프로그램 운영에 그치지 않고, 지역 교육의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하고 싶다. 거점 학교를 중심으로 창의적 체험 활동과 연계해 교육적 경험을 제공할 방법을 모색 중이다. 더불어 교육과정과 입시가 바뀌면서 일선 교사들도 혼란이 크다. 진학과 교육과정을 오래 연구·적용한 경험을 공유하고, 지역 교사도 자신의 고민과 경험을 나누며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또 지역 인재 체질 개선의 일환으로 초·중학생 대상의 독서 교육을 지역 내 도서관, 학교와 연계해 진행하는 안을 검토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학생과 학교가 무언가 ‘해볼 수 있는’ 무대를 많이 만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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