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백두대간 풍경으로 유명한 경북 봉화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어요. 지하에 세계 각지의 야생식물 씨앗이 보관돼 있죠. ‘시드볼트’라고 하는 이 시설은 영하 20℃, 상대습도 40%를 유지하며 보안이 엄격해요. 왜 시드볼트에 씨앗을 모으고 철저하게 관리할까요? 그 이유는 180여 년 전 아일랜드의 감자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취재 최은정 리포터 lagom@naeil.com
자료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서울대학교 식물면역연구센터
순식간에 퍼져버린 ‘감자 역병균’
18~19세기 아일랜드의 주식은 감자였어요. 많은 농민이 감자 농사로 생계를 유지했죠. 감자는 씨앗과 덩이줄기, 두 가지 방법으로 번식할 수 있는데요. 덩이줄기 번식법은 감자 표면의 움푹 파인 부분인 ‘감자 눈’을 잘라 씨앗처럼 심는 방법이에요. 이렇게 하면 유전자를 통째로 복제하는 것과 같아서 부모 세대의 우수한 형질을 그대로 물려줄 수 있죠. 당시 아일랜드 농민들은 대부분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아이리시 럼퍼’라는 품종을 길렀고, 우수한 형질을 물려주고자 덩이줄기 번식법을 선택했어요.
그러다 1845년, 아일랜드 전역에 ‘감자 역병균’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당시 아일랜드 밭의 감자들은 사실상 모두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어요. 역병균에 대한 저항성이 없다는 점도 동일했죠. 감자 역병균은 순식간에 아일랜드 전역을 덮쳤고, 결국 아일랜드인의 식탁에서 감자가 사라지게 됐어요. 이 사건이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기근 중 하나로 불리는 ‘아일랜드 대기근’입니다. 아일랜드인 약 100만 명이 굶어 죽고, 100만 명 이상이 살길을 찾아 해외로 이주하면서 전체 인구의 20~25%가 감소했죠. 과학자들은 아일랜드 대기근의 원인 중 하나를 ‘유전적 다양성’의 부족으로 분석해요.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다양해야 살아남는다
산과 바다, 습지, 사막 등 지구의 모든 환경에 존재하는 생물체의 다양성을 ‘생물 다양성’이라고 해요. 이는 생물 종의 수를 의미하는 ‘종 다양성’, 서식지의 다양함을 뜻하는 ‘생태계 다양성’, 그리고 같은 종이지만 형질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유전자 차이인 ‘유전적 다양성’으로 나뉘죠. 아일랜드 대기근은 이 중 유전적 다양성이 왜 중요한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평가받아요. 유전자가 다양하지 않은 집단은 특정 질병이나 환경 변화로 인해 한꺼번에 무너질 위험이 커요. 반대로 유전적 다양성이 높은 집단은 일부 개체가 변화에 적응하는 유전자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어 결과적으로 멸종을 면할 확률이 높고요.
최근 연구자들은 감자 역병에 대한 해법을 유전적 다양성에서 찾았어요. 야생 감자 중 일부에서 감자 역병균에 저항하는 유전자를 발견한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됐죠. 사람이 기르는 감자와 달리 야생 감자들은 씨앗으로 번식하다 보니 저마다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오늘날에도 감자는 덩이줄기법으로 재배하지만, 전 세계가 하나의 품종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품종을 재배하고 있어요. 야생에서 찾은 유전자를 새 품종에 접목시키는 연구도 꾸준히 하며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계에 단 두 곳뿐인 시드볼트
아일랜드의 비극이 말하는 것은 명확해요.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생물 종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고 그 대가는 너무나 참혹하다는 거죠. 그렇다면 세계는 유전적 다양성 확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그 답 중 하나를 경북 봉화에서 찾을 수 있어요.
기후위기, 자연재해, 전쟁처럼 인류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순간을 대비해 식물 종자를 영구히 보존하는 시설을 ‘시드볼트(Seed Vault)’라고 해요. 전 세계에 이런 시설은 단 두 곳뿐이에요. 그중 하나인 ‘노르웨이 스발바르 국제 시드볼트’는 주로 작물의 종자를 보관하고 있어요. 또 다른 한 곳이 바로 경북 봉화에 있는 ‘백두대간 국제 시드볼트’예요. 이곳은 야생식물 종자 전용 영구 저장 시설이라는 점에서 스발바르 시드볼트와 차이가 있어요. 감자 역병균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야생 식물의 다양한 유전자가 질병이나 기후변화로 인해 생기는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시드볼트는 단순한 ‘종자은행’과는 목적이 달라요. 종자은행은 연구나 재배를 위해 씨앗을 수시로 꺼내 쓸 수 있는 반면, 시드볼트는 해당 종자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만 열 수 있어요. 실제로 스발바르 시드볼트는 2015년 내전으로 종자은행이 파괴된 시리아에 딱 한 번 종자를 내어줬고, 백두대간 시드볼트는 아직 단 한 번도 문을 연 적이 없어요. 시드볼트의 종자를 꺼내야 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게 인류에게는 더 나은 셈이죠.
경북 봉화의 지하에 잠들어 있는 씨앗들은 우리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던져요. 식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지키지 못하면 인류의 생존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이죠. 아일랜드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고 시드볼트의 문을 열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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