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은 대중적으로 익숙하진 않은 학문이다. 고대 유물을 다루는 고고학이나 인류 진화를 연구하는 분야로만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학에서 배우는 교과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인류학은 현재 우리의 삶과 매우 밀접하다. 과거 역사 뿐 아니라 코로나 팬데믹, 음식 문화, 젠더 이슈 등 현재 살아가는 문화의 전반을 다루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의 현상을 다각도로 바라보거나 현장을 직접 관찰하는 인류학적 관점과 방법론은 점차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산업·직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불확실성의 시대, 인류학과만의 강점과 진로를 살펴봤다.
취재 이지연 리포터 judylee@naeil.com
도움말 강윤희 교수(서울대학교 인류학과)·서보경 교수(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안승택 교수(경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
자료 학과 홈페이지·커리어넷
사회·문화 변화에 발맞춰 연구 영역 넓혀
인류학과는 인간과 문화를 종합적으로 다룬다. 역사적으론 최초의 인류가 등장한 생활 양식부터 현대 사회와 미래학까지 다룬다. 내용적으론 세계 여러 문화를 비교 연구하는 문화인류학, 인간의 진화와 생물학적 특징을 다루는 생물인류학, 문화 유적을 연구하는 고고학, 언어 사용과 의사소통의 맥락을 다루는 언어인류학으로 나뉜다.
최근 문화콘텐츠에 대한 수요와 당면한 사회 문제들이 많아지면서, 인류학과의 활동 범위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 특히 문화인류학은 과거, 종교 언어 지역 등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지금은 의료보건 과학기술 젠더 난민 등 다양한 사회적 과제로 시야를 넓히고 있다.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서보경 교수는 “문화인류학과는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두고 동시대 주요 쟁점들을 살펴본다. 예를 들어 의료인류학은 미국에서 연구가 활발한 분야 중 하나다. 실제로 질병통제센터(CDC)에서 의료인류학자는 질병과 환자들의 경험을 관찰하고 이로 인한 사회·문화적 의미를 연구한다. 또한 스마트홈 서비스 역시 IoT 기술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집에 대한 정의, 가족 간 관계 속에서 과학기술의 의미를 해석해보려 한다”고 설명한다.
현지 방문·조사는 학과만의 차별점
인류학과는 학부 모집 단위로는 전국 9개 대학에 개설 중이다. 덕성여대만 글로벌융합대학 모집 단위로 입학해 문화인류학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구조다.
학과명은 인류학과 문화인류학과 고고(문화)인류학과 등 학교별로 차이가 있다. 서울대 인류학과 강윤희 교수는 “서울대는 고고학을 제외한 인류학 영역 전체를 다룬다. 특히 인류의 진화와 인골 연구로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추정하는 생물인류학과 언어인류학을 가르치는 유일한 학교다. 학부 교과상 전반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고 전한다.
교과 과정을 살펴보면, <인류학연구방법실습> <문화현장조사실습> <현지조사방법론>과 같은 방문, 조사 관련 과목들이 눈에 띈다. 필드워크(Field Work)라고 불리는 현지 조사는 인류학과의 차별점 중 하나다. 학기중 낯선 지역을 방문해 특정 집단의 행동을 관찰하거나, 방학을 이용해 동남아시아 등 해외 현지를 경험한다. 특히 해외 오지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지역 주민들과 유대감(Rapport, 라포)을 형성하고 현지인 관점으로 문화를 이해하면서 다양한 시각을 갖게 된다.
인류학과 졸업생들은 사회생활 중 예기치 못하게 맞닥뜨린 상황에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었던 비결로 현지 방문과 조사를 통해 체화한 문화적 감수성을 꼽기도 한다.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안승택 교수는 “인류학과는 현장 기반의 문화콘텐츠를 생산한다. 현장을 방문·관찰해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기 때문에 실용적 지식을 만들어낸다. 현장에 기반을 둔 실천적 접근이 타 학과와의 차이점”이라고 강조한다.
다만 현재는 코로19로 인해 현지 조사가 제한적이다. 안 교수는 “작년 코로나 대구 확산은 전대미문의 상황이었다. 지역 주민들과의 인터뷰로 그때의 경험을 기록했다. 이처럼 인류학은 통계적 수치가 보여줄 수 없는 질적인 지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고 설명한다.
전공 진로는 석·박사 학위로, 이외에는 다방면으로 진출
박물관이나 연구기관 등에서 진로를 이어가려면 석·박사 학위를 취득해야 한다. 현지 연구와 이론적 연마를 통해 보다 전문적인 인류학적 훈련을 받으면 관련 분야에서 일할 수 있다. 졸업 후 대학, 박물관 등의 문화기관, 정부·민간 연구기관, 국제기구 등에서 인류학 전문가로 활동한다.
최근 인문계 진로 분위기처럼, 상당수의 학부생들이 로스쿨 입학이나 공무원 진로를 희망하는 편이다. 안 교수는 “지방 일반직이나 소방 경찰 공무원을 많이 준비한다. 시대적 현상을 부정적으로만 보진 않는다. 각자의 영역에서 인류학과 출신답게 기여하길 기대한다. 탁상행정이 아니라 현장을 찾아가 주민의 요구를 청취하고 실질적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학과 교수들은 이런 공감대를 가지고 강의에 임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외에 감독이나 다큐멘터리 PD 등 미디어 분야, 공연기획, 디자인 회사, 사회적 기업 등 다방면으로 진출한다. 최근 IT 업계 취업도 늘어나는 추세다. 앱 서비스 메뉴 개발 시, 사용자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10년 후의 변화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산업 구조가 급격히 변하고 있다. 인류학과에서 체화하는 다양한 시각,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역량, 협업 역량 등은 미래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전한다.
사람·사회에 대한 관심 필요
인류학과에 진학하려면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심, 사회를 다양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강 교수는 “인류학자는 우선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아야 한다. 그래야 자세한 관찰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인류학자들이 좋아하는 어구가 있다. ‘인류학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익숙하게 보는 학문’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보려는 시각이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사회·문화> 과목은 인류학과 관련이 깊다. <여행지리> <사회문제탐구> <비교문화>와 같은 선택과목을 도전적으로 접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Mini INterview
“호기심과 실천력 바탕으로, 현장과 만나는 것이 바로 인류학”
한승희
경북 국립등대박물관 학예연구원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대학원 졸업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소개한다면?
박물관 학예 업무는 전시, 교육, 소장품 관리, 학술 업무로 나뉘며, 학예연구사(학예사 또는 큐레이터)가 총괄한다. 학예 업무를 보조하는 연구원으로서, 주로 소장품 관리 업무를 보조한다. 때론 전시 기획을 보조하기도 한다.
고고인류학과를 지원했던 이유는?
고등학생 때 사회·문화와 관련된 시사나 책에 흥미를 느꼈고 더 배워보고 싶다. 특히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으면 다른 분야로 확장이나 활용이 가능할 것 같았다. 입학 후 문화인류학을 배우니, 추가적으로 들었던 문화콘텐츠 연계 전공이나 경영학 강의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학과 교수님들의 정성 어린 지도와 열정적인 강의가 좋아 이후 대학원 진학까지 결심하게 되었다.
졸업 후 학과에서 배운 내용과 업무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학예 업무 전반에서,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전시 기획을 할 때 구술사가 필요하다. 구술사는 과거 기억을 말로 풀어내고 역사적 사실로 기록한 것이다. 구술사나 다른 질적 조사를 할 때 학교에서 들었던 수업을 유용하게 활용한다. 또한 소장품 수집이나 기초 자료 조사 시에도 교과에서 다뤘던 근대, 민속 관련 내용이나 고고학적 지식을 이용하고 있다.
고고인류학과 전공에 필요한 역량과 적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호기심과 실천력이다. 인류학은 현장에서 발로 뛰는 학문이라고도 한다. 도서나 인터넷 커뮤니티, 시장이나 골목 등 어디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호기심이 생기고 질문이 떠오른다면, 반드시 현장을 접해봐야 한다. 이러한 접근으로 문화에 대한 질적 연구가 가능하다.
고고인류학과를 지원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고고학과 인류학을 함께 배우는 고고인류학과가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쉽게 말하면 우리 문화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고고학은 유물이나 유적을 통칭하는 물질문화를 통해 과거의 문화를 배우고, 인류학은 질적 연구 방법을 활용해 현재 우리 삶을 배우는 분야다. 이러한 이론을 자신의 관심 분야에 접목시켜, 동영상을 만들거나 글을 쓰거나 공모전에 응시할 아이템을 만들어보는 등 다방면으로 관심 있는 활동을 시도해보면 좋겠다.
“학과의 배움이 취업보다, 삶 전체의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
한유경
국가 공인 브레인트레이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졸업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소개한다면?
국가 공인 브레인트레이너로서 브레인트레이닝과 명상을 가르치고 있다. 브레인트레이너는 뇌 활용 법칙을 통해 인간이 가진 잠재력을 100% 끌어내도록 돕는다.
문화인류학과를 지원했던 이유는?
초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과 함께 읽었던 호주 애보리진 설화가 시작점이다. 호주 원주민들이 자연과 소통하며 삶의 지혜를 얻고, 실천하는 내용이 인상 깊게 와닿았다. 고등학교 시절 환경운동에 심취하면서 어떤 과를 가면 이런 활동을 더욱 활성화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문화인류학과로 전공을 결정했다.
졸업 후 학과에서 배운 내용과 업무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떤 인간도 다른 생명보다 우월하지 않으며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이 공생하고 화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대다수의 인문학 전공처럼, 학과의 배움이 취업과 직결되진 않는다. 하지만 삶 전체의 방향성을 놓고 보면 무엇보다 큰 배움이다.
문화인류학과 전공에 필요한 역량과 적성은 무엇인지?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인류학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문화를 이해하려는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포용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학과 지원을 희망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문화인류학은 어쩌면 너무나도 낭만적인 학문일 수 있다. 경쟁에서 이기며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만을 위해 달려가는 삶은 결국 허무하게 종결될 수 있다. 삶에서 반드시 던져야 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일 것이다. 문화인류학에 열정을 가진 후배들이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공부한다면, 졸업 후 어떤 진로를 선택하더라도 자신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회에 관심 많다면, 인류학과 추천”
이수헌 루트임팩트 앰팩트캠퍼스팀 담당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졸업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소개한다면?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청년들이 체인지메이커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최근에는 온라인 플랫폼을 담당하고 있다.두 업무 모두 고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협력하며 적합한 프로그램이나 상품 서비스를 구상하고 실행하는 일이다.
문화인류학과를 지원했던 이유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사람과 사회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특히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의 원인과 사람들의 삶이 궁금했다. 솔직히 학과를 지원할 때만 해도 문화인류학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문화와 인류라는 단어, 그리고 학과 소개 홈페이지의 글에 마음이 끌렸다.
졸업 후 학과에서 배운 내용과 업무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문화인류학은 문화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학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인터뷰하며, 이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을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여 서술하고 해석해내야 한다. 이를 위해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사회·문화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많아야 한다. 인류학 연구 방법론에서 배운 관점과 태도가 많은 도움이 된다. 결국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사고하는 힘을 길렀다고 생각한다.
문화인류학과 전공에 필요한 역량과 적성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궁금증도 필요하다. 다양한 국가의 인종, 문화에 대한 책이나 논문을 많이 읽어야 하고 글도 써야 한다. 사람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도 중요하다. 정리하자면 자기 주도성, 분석력, 협업과 소통 역량이 필요하다.
학과 지원을 희망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졸업 후에 내가 아닌 타인, 더 나아가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고, 사람과 사람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와 환경에 대해 분석하는 것을 즐긴다면 문화인류학과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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