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고 잘할 수 있는 진로를 찾고 싶었다. 심리학 철학 영문학 사회학 사학 언어학 국문학 등 약간이라도 눈길이 갔던 분야는 도서나 영상을 찾아 훑었다. 수업 내용과 연결해볼 만하거나 궁금한 부분은 추가로 자료를 조사하고, 실생활 속 현상이나 사회 문제와 엮어 탐구하거나 찬반 토론 원고를 써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언어’와 ‘사회 현상’이라는 교집합을 발견했다. 일찍이 미디어에 흥미를 느낀 것도 둘을 함께 다뤘기 때문임도 깨달았다. 하지만 딱히 끌리는 관련 직업은 찾지 못했다. 지망 전공도 국어국문학과와 사회학과를 두고 오래 갈등했다. 다시 둘의 ‘교집합’을 찾아봤다. 그리고 ‘사회언어학’을 만났다. 이후에도 국어·사회·수학·영어 등 교과와 학년을 넘나들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관심 주제를 탐구해나갔다. 그 결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일반전형으로 합격했다. 2024 수시 합격생 릴레이 인터뷰의 첫 주인공, 김진주씨를 만났다.
취재 정나래 기자 lena@naeil.com
사진 배지은
김진주 |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입학 예정(경남 마산무학여고)
언어와 사회, ‘교집합’ 진로는 없을까?
‘사회언어학’은 성별·연령·사회계층 등의 사회적 요인이 언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사회 현상 속에서 언어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등을 다루는 분야다.
“언어는 도구라 누구나 활용하는데, 같은 말·글도 쓰는 사람에 따라 전달력이나 심미성이 크게 달라지는 점이 흥미롭죠. 무엇보다 현대 사회에서 더 강조되는 ‘의사소통’의 핵심이 ‘언어’고요. 외국어도 좋아했지만, 우리말과 글이 가장 재밌었어요. 또 전 이론을 파고드는 것보다 우리 사회에 발생하는 여러 사회 문제의 근본 원인과 해결책을 찾거나, 사람들의 생활에 도움이 될 실용 학문에 흥미가 컸어요. 제 흥미 분야와 성향을 만족시킬 분야를 찾던 중 ‘사회언어학’을 알게 됐죠. 대학 전공이나 주요 학문의 세부 분야는 매우 다채롭고 그만큼 방대해요. 상반된 학문과 융합된 분야도 많고요. 진로를 고민할 때, 학과 이름이나 특정 직업만 떠올리기 쉬운데 좀 더 파고들거나 ‘교집합’을 찾아본다면 예상외의 길을 찾을 수 있어요.”
문학→문해력→AI→통계→고령화
국어·수학·사회 넘나든 ‘꼬꼬무’ 탐구
자신의 성향을 파악하고, 진로를 탐색하는 데 수업의 역할이 컸다. <법과 정치> <윤리와 사상> <생활과 윤리> <사회·문화> <사회문제탐구> <사회과제연구> <세계문제와 미래사회> 등 사회 과목과 <고전문학감상> <언어와 매체> <심화국어> <영어독해와 작문> <한문> 등 언어 관련 과목을 집중 선택하면서 흥미 분야를 알게 됐다. 여기에 다양한 탐구 활동은 호기심을 해결하며 지식의 깊이를 더하는 길잡이가 됐다.
“암기를 싫어해요. 수업을 들을 때 기초 개념부터 하나라도 이해하지 못하면, 끝까지 붙들고 있는 편이고요. 그렇다 보니 지식을 직접 응용해보는 게 개념 이해나 심화 학습에 도움이 되더라고요. 주제 탐구 활동을 열심히 한 이유예요. 물론, 학생부 기록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웃음) 다만 탐구 활동은 주제와 방법을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효율을 높이려고 방학 때 다음 학기 교과서를 훑어보며, 눈길이 가는 부분에 이전에 배웠던 내용을 적용해볼 수 없을지 고민했어요. 예를 들어 1학년 때 책에서 헤겔의 변증법을 접하고 핵심 개념인 ‘정반합’을 가져와 국어와 사회에 대한 제 관심이 충돌·융합돼 사회언어학에 닿았다는 해석을 했었어요. 이후 학교에서 진행된 EBS <위대한 수업> 강연자들의 대표 저서 독서·토론 활동에서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을 읽었는데, ‘타인과 공동체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 흥미로웠죠. 2학년 <독서> 시간에 문학 감상을 다룬 ‘감상적 읽기’ 단원에서 김춘수 시인의 <꽃>을 <인정투쟁>의 내용과 변증법의 자기 의식을 엮어 해석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 내용을 수업 때 서평으로 작성·발표했는데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문학에 대한 흥미는 사회 문제인 ‘문해력 저하’에 닿아 교내 구성원들의 문해력 정도를 측정하는 챗봇 시스템을 제작, 테스트 결과를 발표하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문해봇’이라는 이름의 말뭉치 챗봇 시스템을 학습시키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흥미가 낮았던 수학·과학과 언어의 접점을 깨닫고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다. 그 결과 수학은 고1 1학기 3등급에서 2학년 2학기 1등급으로 성적이 상승했다. 특히 <확률과 통계>에서 배운 내용은 3학년 때 새롭게 관심을 가진 ‘고령화 사회’ 이슈와 접목해 다양한 과목에서 활용했다.
<수학과제탐구>에서 전국민 문해력 조사 결과를 분석해 세대 간 특히 고령층의 문해력 저하 문제를 발견했고, <사회과제연구>에서는 OECD 회원국의 노인 자살률과 국내 연령대별 독서율 통계를 바탕으로 고령층에 적합한 말뭉치와 ‘도파민’을 유발할 수 있는 문학을 학습시킨 AI 스피커·소셜 로봇을 독거노인의 우울증 해결 방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대중에게 친숙한 인공지능 스피커는 ‘언어’, 특히 일상생활의 불규칙한 ‘자연어’ 처리가 중요해요. 이를 기계에 학습시킬 때 수학적 개념이, 도구로 활용될 때 과학 기술이 응용되고요. 특히 <확률과 통계>는 쓸모가 많아 더 흥미를 느꼈어요. 학습에 큰 동기부여가 됐고, 다른 과목에 다양하게 활용하면서 수학 역량도 높일 수 있었어요.”
좌절 속 용기냈던 도전, 놀라운 반전
3학년, 수시 지원을 앞두고 고민이 컸다. 전공은 국어국문학과로 좁혔지만, 대학과 전형이 문제였다. 인문·자연을 통틀어 네 번째로 우수한 교과 성적이었지만, 3학년 1학기 내신이 2학년에 비해 1등급 가까이 하락했다. 이수 과목도 걱정됐다. 서울대 인문대학과 사회과학대학(경제학과 제외)에는 따로 권장 과목이 없었지만, 상위권 대학 국문과에 지원하려면 <동아시아사> <세계사> 이수는 필수라는 이야기가 많아 불안했다. 담임교사, 3학년 부장교사와 거듭 면담해 학교장 추천형 교과전형을 중심으로 수시 원서를 작성했다. 고려대와 성균관대, 연세대, 한양대, 중앙대로 후보를 좁혔고, 서울대만 종합전형인 일반전형으로 응시했다.
“2등급을 받은 네 과목 중에 세 과목이 등급 시작점이었어요. 0.15, 0.2점 차이로 결과가 갈렸죠. ‘종합전형에선 3학년 1학기 성적이 중요하다’라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돌아서 힘들었죠. 결국 교과전형 위주로 원서를 썼고요. 한데 제 학교생활이 좀 아까웠어요. 선생님께서도 서울대 종합전형 도전을 권유하셨고요. 지역균형전형은 교내 추천 기준에 미치지 못해 일반전형으로 접수했는데, 일반고 합격률이 낮고, 제시문 면접을 하는 전형이라 기대는 없었어요.”
결과는 반전이었다. 유일한 종합전형이었던 서울대 국어국문과에 최초 합격한 것. 이어진 수시 결과에서 고려대·중앙대는 최초 합격, 연세대는 최종 불합격, 한양대·성균관대는 추가 합격했다. 교과전형은 단순하다고 생각했는데, 전국에서 비슷한 성적대의 지원자가 몰려 경쟁이 치열하고, 중복 합격도 많아 결과를 예측하기가 어려웠다고. 무엇보다 진주씨는 종합전형에서의 합격이 노력했던 고교 생활을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적합한 전형’의 중요성도 깨달았죠. 제시문 면접은 준비 시간도, 답변 시간도 길어 충분히 생각하고 답변할 수 있는 데다 면접관이 제가 방향을 찾아가도록 이끌어줘 오히려 좋았어요. 반면 녹화형 면접은 혼자 말하다 보니 상황 파악이 어려워 답변을 후회했고 결과도 나빴죠. 수능도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당일 영역별 난도나 개인 컨디션에 따라 모의고사와는 동떨어진 결과가 나오기 쉽고요. 특히 사탐은 한 문제만 틀려도 2, 3등급이 돼 부담이 커요. 그런 면에서 보통의 고등학생에겐, 3년간의 노력을 수치와 그 배경까지 아울러 평가하는 종합전형이 가장 덜 어려운 입시 같아요. 과목 선택의 경우, 인문 계열은 대학 전공과 연계가 직접적이지 않아 유연하게 평가한다는 인상이고요. 그만큼 자신의 흥미 분야를 중심으로 최선을 다하면 기회를 잡을 수 있어요. 등급에 일희일비하거나 정확하지 않은 ‘카더라’ 정보에 지레 포기하지 말길 바라요.”
나를 보여준 학생부 & 선택 과목
<선택 과목>
▒ <법과 정치> <사회·문화> <사회문제탐구> <사회과제연구> 사회 문제의 구조적 원인과 이를 조사·분석하는 방법을 배우고, 다시 실생활 속에서 응용해보면서 현대 사회 문제에 대해 순차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 <고전문학감상> <언어와 매체> <심화국어> <영어독해와 작문> <한문Ⅰ> 국어와 영어를 중심으로 문학부터 문법까지 깊이 있게 공부하기 위해 선택했다. 문학 작품 감상부터 사회 문제 분석까지 ‘쓰기 활동’을 활용해 다른 교과에서 배운 내용과 연계, 흥미 분야 탐구 활동을 하기도 수월했다.
▒<융합과학> <생태와 환경> ‘문해봇’ 활동 후 선택한 과학 과목. 기후변화 등 사회·환경 문제와 엮어 과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진로선택 과목이라 성적 부담이 적은 만큼, 과학을 피했던 인문 성향 후배들에게 추천한다.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
<1학년>
<국어>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배운 후 ‘문법적 요소를 고려해 작품 전체를 반어적 어조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의 학술자료를 근거 삼아 창의적 해석에 대한 포부를 밝힘 <영어> 원서 완독 후 <국어>에서 학습한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과 공통 속성을 발견해 입사형 성장소설 측면에서 분석 <통합사회> 시장 경제와 금융 단원 학습 내용을 <국어> 교과서의 <허생전>에서 찾아보고, 소설이 나온 조선 후기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함
<2학년>
<영어Ⅱ> 언어 학습 인공지능 지문을 이해하기 위해 조사하던 중, ‘자연어 처리’를 접하고 온라인 강연회 영상을 시청해 지식을 확장 <확률과 통계> ‘통계 활용 프로젝트’에서 자연어 처리와 연계해 ‘초거대 인공지능 언어모델 동향 분석’을 탐구 <심리학> <총 균 쇠>에 언급된 한글의 우수성에 주목해 한국어의 특징을 조사, 한글의 유연성이 자연어 처리(NLP) 기술을 어렵게 만든다는 점을 발견
<3학년>
<영어독해와 작문>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원서로 읽고, AI 시대 데이터 활용 규제의 필요성을 논리적으로 주장 <사회과제연구> 소논문 활동에서 AI 스피커·소셜 로봇의 노인 건강 증진 효과를 내세워 감성 대화 말뭉치 등 언어 베이스 구축·보급 필요성을 역설 <한문Ⅰ> <생활과 윤리> 학습 용어의 의미를 한자의 뜻과 교차해 깊게 이해하고, 잘 모르는 한자 어휘를 정리해 문해력 향상을 위한 캠페인 활동에 활용
<교사의 눈으로 본 수시 합격생>
“성적보다 태도가 돋보이는 학생”
진주는 공동체 역량과 인성이 좋은 학생입니다. 졸업식 전날, 학교 수위실을 찾아 3년간 감사했다는 인사와 편지·선물을 전했죠. 3년 내내 임원을 하며 반 분위기를 북돋거나, 함께 학습 역량을 높일 활동을 꾸준히 기획·운영해왔고요. 교과 교사의 눈에도 입시를 위한 리더십 활동이 아님이 보였습니다.
학업 면에서는 계속 도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수학은 인문계 성향이 강한 진주에게 상대적으로 까다로웠을 교과인데도, 수업 시간엔 교사와 눈을 맞추고 피드백을 구하며 자연 계열 지망 학생들에 크게 뒤지지 않는 결과를 냈어요. 어려워도 자연어 처리, AI, 문해력, 문학 등 자신의 관심 분야에 수학 개념을 적용해보려 했고, 다른 교과에서도 통계를 꾸준히 활용하며 노력했더라고요. 어려운 분야에도 거듭 도전했던 진주가 원했던 국어국문학을 배우며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가 큽니다. _ 경남 마산무학여고 박주연 교사(수학 담당, 교육과정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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